[태평로] "평화 구상이 공화국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조선일보
입력 2020.01.06 03:15

북측도 정부 구상 외면하는데 文 대통령 '오로지 평화' 고집
참모들 誤判, 눈치보기에 국제적 외톨이 될 수 있다

배성규 정치부장
배성규 정치부장

작년 말 우리 정부 관계자가 일본에서 조총련 간부를 만났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에서 'DMZ 국제평화지대' 구상을 밝힌 이후였다. 비핵화 협상 촉진을 위한 평화 구상을 설명하자, 그 간부는 다짜고짜 짜증부터 냈다고 한다. "그런 제안을 뭐 하러 미국 가서 합니까?"

우리 측은 "대북 제재 문제와 북한 경제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했지만, 그는 "공화국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잘랐다. "미국에 그런 구상 밝히고 부탁해 봐야 제재 완화가 됩니까? 트럼프가 그걸 빌미로 미국산 무기나 더 사달라고 요구할 텐데, 오히려 공화국만 피곤해집니다." 미국을 상대로 쓸데없이 '북한 세일즈'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24일엔 남·북·중·러를 포괄하는 철도 공동체 구상을 밝혔다. 북은 한마디 응답도 하지 않았다. 앞서 정부는 북한 원산·갈마 지역 등에 대한 관광 개발을 북에 제안했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금강산 관광 시설 철거를 요구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북은 여기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2일 다시 "남북 관계에서 운신의 폭을 넓히겠다"며 '상생 평화 공동체론'을 폈다. 김정은이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새 전략무기로 충격적 실제 행동"을 경고한 다음 날이었다. 북이 뭘 하든, 미국과 국제사회가 어떻게 보든 '외눈박이식' 대북 정책을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고집으로 읽힌다.

문 대통령은 이것이 북한과 미·중·일·러에 통할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북한은 노골적으로 한국을 배제하면서 남북 관계도 중단시켰다. 처음부터 김정은이 원한 것은 제재 완화였다. 한국에 바란 역할도 트럼프 대통령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것이었다. 제재를 풀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 주도권을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거듭된 문 대통령의 대북 구상에도 외교적 수사(修辭) 한마디 내지 않고 있다.

평화구상을 추진하면 중·러가 북 비핵화와 남북 관계에 도움을 줄 거란 기대도 일방적 희망일 뿐이다. 시진핑 주석은 작년 김정은과 만났을 때 진전된 비핵화 조치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대규모 식량 지원과 밀무역 묵인으로 제재의 뒷문을 열어줬다. 외교부 관계자는 "푸틴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북 안전 보장 시점까지 핵보유를 용인하겠다'는 메시지를 준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미·북이 지금처럼 충돌 국면으로 가면 대북 평화 구상만 외쳐온 문 정부는 국제적 외톨이가 될 수 있다. 더구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등 북의 고강도 도발에 대한 대책은 사실상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안보 당국자는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정부 내부에선 "혹여 미·북 협상이 풀려도 걱정"이라는 말이 나온다. 김정은이 대선의 기로에 선 트럼프를 상대로 협상 주도권을 잡은 뒤 "한국은 빠지라"고 하면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정보 당국 관계자는 "김정은이 '무능한 남한 정부에 실망했다'는 말을 주변에 수차례 한 것으로 안다. 이후 '남한 패싱' 기류가 뚜렷하다"고 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문 대통령이 제대로 알고 있느냐다. 청와대 안팎에선 최근 "경제·안보 상황 보고가 제대로 못 올라가고 '커팅' 되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온다. 참모들이 상황을 오판하고 눈치만 보면 대통령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하고 싶은 대로만 하게 된다. 최근 문 정부의 '오로지 평화' 구상이 이 때문이라면 나라 안보가 위태로운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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