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신춘문예] 증식하는 파괴자 -김건영 시집 『파이』-

  • 김동진
입력 2020.01.01 03:00

[문학평론 당선작]

0. 노루웨이

‘말장난이란 무엇인가’. 다분히 본질적이면서 거대한 이 질문은 말장난이 갖는 가벼움 혹은 유쾌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노루가 다니는 길은 노루웨이(노르웨이)’ 같은 말장난에 그 정의와 근본에 대해 묻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그런데 간혹 어떤 말장난들은 우리의 내면을 건드리는 무언가를 갖고 있기도 하다.

한 사람이 물었다.
“빠네파스타의 하드롤은 빵입니까 그릇입니까?”
그러자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그릇 된(그릇된) 빵입니다.”

빠네파스타는 하드롤 빵의 안을 파내어 파스타로 채운 요리를 말한다. 빠네파스타의 하드롤은 정말 말 그대로 ‘그릇 된’ 빵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빵’이란 기표가 품는 의미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빵은 먹는 것이고 먹는 것은 그릇에 담기는 것이지 그릇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릇된 빵’인 것이다.
진정 그릇 된 빵은 그릇된 것인가? 그릇이자 빵인 대상을, 전형적인 빵의 표상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그릇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이처럼 ‘그릇된 빵’ 말장난은 인간의 인식과 분류체계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말장난의 매력이고 위력이다. 하나의 기표 위에 여러 의미들이 교차하고 포개지며 관계를 맺고 의미의 낙차가 형성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가 발생한다.

1. B가시적 상상력

1. 인간의 살상력은 무한하다
2. 모두에 대한 모두의 투정 상태
3. 미래는 앓을 수 없다
4. 다윈과 골리앗
5. 이 죄 가면 원죄 오나
6. 개들은 빠루에 죽는다
7. 피할 수 없으면 질겨라
8. 내 이름은 발광
9. 이상한 나라의 엘리트
10. 우리들의 일부러 진 영웅

-「받아쓰기 -蛇傳 1」 부분

김건영의 작법은 마치 언어유희의 시적 기능을 증명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시를 자주 읽지 않는 사람이 보더라도, 인용된 시의 시적 문법이 독특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받아쓰기 -蛇傳 1」에서 인용된 문장들은 분명한 말장난, 언어유희다. ‘상상력’이 “살상력”으로, ‘투쟁’이 “투정”으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단어가 바뀌어도 문장과 의미가 성립될뿐더러, 오히려 변경되기 전의 문장이 가졌던 의미와 대비되며 보다 넓은 영역까지 의미가 확장된다. 본래 창창한 미래에 대한 낙관을 품고 있던 문장이 순식간에 인간들이 자행한 무수한 살상과 전쟁의 얼룩들로 뒤덮인다. 이러한 뒤틀림과 확장은 김건영이 말을, 언어를 교차시키고 확장하는 것에 고유하면서도 섬세한 감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예증한다.
그런데 그 감각이 단순히 음소의 교체만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눈에 띈다. “이 죄 가면 원죄 오나”는 ‘이제 가면 언제 오나’의 변형이다. ‘이제’에서 “이 죄”로의 변형은 음절 하나가 변형되는 것보다 다소 복잡한 양상을 보이나, 유사한 원리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언제’에서 “원죄”로의 변형은 음절 하나의 변형이 아니다. 이는 ‘언제’라는 하나의 단어가 그와 비슷한 청각 이미지로 구성된 “원죄”로 전이된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는 상이한 두 가지 요소들이 정신적 결합에 의해 맺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거기서 두 가지 요소란 ‘청각 이미지’와 ‘개념’이다. 흔히 알고 있는 ‘기표’와 ‘기의’에 대입해본다면 이해가 쉽다. 그런데 어째서 ‘기표’를 ‘청각 이미지’라고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기표를, 단어를 구성하는 것이 소리의 최소단위인 ‘음소’이기 때문이며 그 음소는 연속체로 존재하는 물리적 청각 음파의 일정 부분에 대한 ‘범주’이기 때문이다. ‘ㄱ’과 ‘ㅋ’의 경계는 물리적으로 명확히 구획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화자들이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이유는 각각의 음소들이 언어생활 속에서 축적된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진 하나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소쉬르에 의하면, 소리의 심리적 흔적이 바로 청각 이미지인 것이다.
‘언제’에서 ‘원죄’로의 변형은 하나의 청각 이미지로부터 다른 청각 이미지로 이어지는 미끄러짐이다. 이중모음 ‘ㅝ’를 발음할 때 혀와 턱의 위치는 ‘ㅓ’를 발음할 때와 비슷한 곳으로 이동하며 ‘ㅚ’의 경우 역시 ‘ㅔ’와 비슷한 위치로 이동한다. 조음 위치가 유사하다는 것은 실제 음소가 발음될 때 만들어지는 음파가 유사한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각각의 음소들이 명확히 구별되는 하나의 범주로 설정되어 있지만, 그것이 발음되는 실제 양상들 사이에는 유사점이 존재하고 있다. 시인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낸다.

그런데 침대 위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새로 태어났다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비밀의 막은 투명하다 비가 올 때는 벌들이 쉬고 있다 벌들이 날 때는 비가 그친다 이것은 구름을 번역하다 생긴 나머지 값 비가시적 상상력 장미와 장마는 밀월관계다 B를 공유한다

벌레를 한사코 벌래라고 적던 남자를 알고 있다 우리는 침대 위에서 부리를 비비며 그를 비웃었지만 우리의 비밀이 罰來 같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침대는 죄 많은 사람을 태우고 떠오른다 목매단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악보를 완성한다

영혼의 벗은 몸이지
인간의 참다운 비행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영혼을 벗은 몸이지

나는 버터를 볶아 루를 만들었다 이것은 구름을 재현하는 사고실험 가시라고 했더니 혀 밑에 장미가 가득 피었다 아궁이 속의 소년들이 울면서 루를 태웠고 밤이 부엌에서부터 왔다

벌들은 주위를 맴돌며 날개를 비빈다
퍼즐, 퍼즐 즐거운 미로

카세트테이프의 뒷면에는 벌이거나 비이거나 벼랑 위의 보풀이거나 비참한 전생의 부레, 부패한 보름달과 검은 불에 익힌 빵이 들어 있다 노래를 듣는 동안은 B를 피할 길이 없다 불 안에서 불안참기 나는 이 노래를 태우고 있으니 무섭지 않다 입속에 벌을 한가득 물고

부유한 배교자들 뒤로
사교적인 사제들
버드나무 속에는 버드 버드
그러나 그러나
비가 그치면
유리병처럼 햇빛이 떨어지고
무지개를 발음하기 위해 피는 더 붉어진다

-「B」 전문

“장미와 장마의 밀월관계”는 “비가시적 상상력”을 거치며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벌(Bee)과 비(雨), 즉 “B를 공유”한다. 비와 벌이 B라는 하나의 청각 이미지 안으로 귀속될 때, 개념적으로 벌과 비를 거느리는 ‘장미’와 ‘장마’의 밀월관계가 완성된다. 문자로 구별되는 벌과 비를 비가시적 상상력을 통해 동일한 것으로 취급해야만 밀월관계가 이루어진다. ‘비(B)가시적 상상력’은 곧 시각적 기호 너머에 존재하는 물리적 음파를 포착하는 감각이다.
그런 점에서 “벌레를 한사코 벌래라고 적던 남자”는 흥미롭다. 현대 국어에서 ‘ㅔ’와 ‘ㅐ’의 발음 차이가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발화에서 그 둘은 거의 구별되지 않으며. ‘ㅔ’와 ‘ㅐ’의 차이는 시각적으로 표기된 문자들에서만 감지 가능하다. 김건영이 각 문자들을 소리의 연속체로 파악하고 있다면, ‘ㅔ’와 ‘ㅐ’의 차이는 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침대”가 “죄 많은 사람을 태우고”있다면 “침대 위에서 부리를 비비며 그를 비웃”고 있는 “우리”는 죄인이다. 그들이 죄인이 되는 이유는 ‘맞춤법’이란 질서에 묶여 문자들을 청각 이미지가 아니라 시각적 기호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언어를 파악하는 방식에 위배되는 일이다. 그러나 진정 질서에 맞춰 글을 쓰는 것이 죄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이 김건영의 세계에서 죄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2. 질서를 파괴하는 방법

시인에게는 “질서 역시 질병의 한 순서일 뿐이다”(〈3〉). 그렇다면 현대국어의 질서에 철저한 「B」의 “우리”는 질병의 보균자일 뿐이다. 질서는 개별로 존재하는 것들을 자신의 규칙을 따라 복속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강제력을 지닌다. 질서가 질병이라면 질서를 믿는 이들은 타인들에게도 질병을 옮기려는 존재들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죄인인 것이다.
「B」의 화자는 침대 위에 내리는 빗속에서 “새로 태어났다”. 이 문장은 중의적이다. 부리를 비비는 모습을 본다면 새(鳥)로 태어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침대 위에서 비(B)를 맞으며, 비가시적 상상력을 통해 새(新)로 태어난 것일 수도 있다. 불타는 침대에서 벌을 받으며 카세트테이프로부터 밀려오는 B들을 듣는 일은 화자에게 “불 안에서 불안참기” 같은 일이다. 그 불안은 아마도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언어를 포착하며 펼쳐질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노래를 태우고 있으니 무섭지 않다”. 그가 실제로 발화를 수행해온 입에는 이미 벌(B)이 한가득 들어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부유한 배교자”가 된다. 기존의 문자질서를 포기하는 일이 배교가 된다면 질서는 종교의 교리와 동일한 것이 된다. 문자질서와 교리가 같은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우리는 시인이 신을 이야기하는 방식 역시 납득할 수 있다.

몸속에 먼지가 가득 쌓여 있다
그것들은 애완 먼지였으므로 모두에게 이름을 지어 줘야 했다 그것들은 서로 너무 닮았고 작았다 신이라는 것은 어쩌면,

거짓과 진실을 섞어 진실한 거짓말을 만들었다
천사의 뒤편에는 무엇이 있을지 알고 있다
그림자가 있겠지 그래
독실한 신성모독자인 그는 매 순간 신을 욕보였지만 기록에 남는 불경이 필요해서 문장을 지었다

신이 잠들었을 때 그의 안구가 보고 있던 것은
우주 속을 떠도는 찻주전자 하나
아름다운 일인용 지옥


없다,가 있다 있다,가 없다 평범한 일은 이상하다
이상한 일이 평범하다 믿음은 참 안온하지

신이 있다면
신이 없다면

신을 믿는 사람이 주는 마음은 꼭 잔반 같았는데 그는 싫어하지 않았다 시 같은 걸 쓴다고 믿는 김건영은 잔반을 받아먹고도 살이 쪘다
사방에 공기가 가득 차 있다 어디에나 신이 있다니 믿어지느냐고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듣는다면 불편하겠지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을 자랑한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앞에서 성호를 긋는다
가슴에 두 발 이마에 한 방 참 안온하다
테트리스 게임처럼 완전히 채워진 것은 사라진다
한 은총이 다른 사람의 은총을 천천히 거둬간다 역순으로 단단한 믿음이 총알처럼

나는 아직 한 번도 죽어 본 사람을 못 만났다

아침마다 알약 세 개를 삼키고
나서 묻는다 이게 총알이었나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은 대체 어디서 옵니까

우산을 숭배하는 비가 있다 누군가 우산을 펼쳤기 때문에 비가 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더러 울고 더러울 테니 너희들은 비를 맞으라

내가 연습하던 죽음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언젠가 신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을 수 있다면


⦁우주 속을 떠도는 찻주전자: 러셀의 찻주전자

-「모잠비크 드릴」 전문

「모잠비크 드릴」의 화자는 “독실한 신성모독자”이다. 신은 “없다,가 있”는 것이다. 러셀이 우주를 떠도는 찻주전자를 이야기하며 비판했던 것처럼, 신은 불가지의 영역에 위치하면서 그의 존재여부를 논증하려는 모든 시도로부터 벗어난다. 논증이 불가능하다면 신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믿음’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러나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을 자랑”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앞에서 성호를 긋는다”. 마치 발화들이 문자질서의 규칙에 맞춰 문자로 전사되는 것처럼, 신은 모든 존재의 기원과 목적을 교리에 따라 정의한다. 신의 존재를 믿는 자들은 그 정의를 신봉하므로 고통스러워하는 이 앞에서 그가 누구인지 아무 상관없이 성호를 긋는다. 언어규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ㅔ’와 ‘ㅐ’를 구분하여 적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어규정과 신의 공통점은 그곳에 있다. 신 앞에서는 개인이 겪는 모든 고통이 고유성을 잃고 ‘신의 시련’으로 환원된다. 신 아래서 개인이 느끼는 모든 고통은 다 똑같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신의 교리는 무용하다. 화자가 “천사의 뒤편에” 있는 것은 “그림자”라고 말하는 것에서 드러나듯,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실재다. 그가 신을 믿지 않는 이유는 “아직 한 번도 죽어본 사람을 못 만났”기 때문이다. 화자에게 신을 믿는 일은, 자신이 감각으로 포착한 실재들을 버리는 일과 같다. 그것은 곧 고유성의 포기다. 환원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슴에 두발 이마에 한 방” 성호를 긋는 일은 “참 안온하다”.
시인이 모든 질서로의 환원을 거부한다는 면에서, 말장난을 통해 문자 체계를 교란하는 특유의 작법은 매우 효과적이다. 문자의 기본 단위인 음소를 시각적 기호가 아니라 음성적 실체로 파악하면 표준어기준은 기저에서부터 해체된다. “우리의 비밀이 罰來같았다”는 진술이 힘을 갖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비(B)가시적 상상력’을 통해 음소 뒤의 음성적 실체를 제시한 뒤에 “벌래”의 동음이의어 “罰來”가 등장한다. 이 문장은 하나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다. 시에서의 “그들”이 “벌레를 한사코 벌래라고 적던 남자”를 비웃던 행위가 본질적으로 벌레를 벌래라고 적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음성적 실체를 외면하고 질서에 순응하려는 그들의 행위가 곧 벌을 받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한 문장에 걸쳐지는 여러 의미들은 시인이 배치한 시어들의 맥락에 따라 유기적으로 생성된다.
“나는 여전히 더러 울고 더러울 테니 너희들은 비를 맞으라”, “불 안에서 불안 참기”, “그레고르 잠자는 습속의 군주에게 죽임을 당했다”(「야구 - 蛇傳 9」) 같은 문장들에서는 통사구조마저 붕괴된다. 띄어쓰기를 바꾸는 것만으로 의미가 변주되고, 고유명사 ‘그레고르 잠자’의 뒤에 ‘습속의 군주’를 붙이면 완전히 별개인 두 개념이 이어진다. 통사구조를 무너트리며 문자질서의 파괴는 언어질서의 파괴까지 확장된다. 그곳에서 김건영만의 독자적인 시 스타일이 등장한다. 언어질서가 흩어진 자리에 시인은 자신만의 질서를 세우며 자신의 내면을 재현해나간다. 청각 이미지가 미끄러지면서 문장의 의미가 분열되고 문장이 뒤틀리며 의미가 증식한다. 그렇게 김건영의 시가 탄생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신을 믿는 사람이 주는 마음은 꼭 잔반 같았는데” “시 같은 걸 쓴다고 믿는 김건영은 잔반을 받아먹고도 살이 쪘다”. “언젠가 신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을 수 있”기를 바라는 화자가, 시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김건영’이 그가 그토록 거부하는 신을 믿는 자들이 주는 마음을 먹고 살이 찐다는 것이다. 감각으로 세계를 포착하려면 육체가 필요하다.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요소들로 말미암아 질서로의 환원을 거부하는 그에게 질서에 충실한 자들의 생산물이 몸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은 모순적이다. 또 하나의 본질적 모순은 그가 바로 ‘시인’이라는 것이다. 시는 언어예술이기 때문에 언어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김건영의 작법은 문자화에 작용하는 문자질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질서의 의도적 파괴가 갖는 시적 함의는 기존에 존재하는 문자 질서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중대한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 신을 욕보였지만 기록에 남는 불경이 필요해서 문장을 지었다”는 진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시는 지면 위에 선다

사는 동안 더 많은 잘못을 하도록 해 그러면 기억의 윤곽이 단단해질 테니

슬픔이 없는 농담은 싫다
그건 누군가 발라낸 거죠
신은 황혼녘에 푸줏간을 차려 놓고 기다린다

그러니까 슬픔이 뼈인지 고기인지 모를 저녁에
머릿속에는 얼어붙은 구름이 굴러다닌다

완벽한 세계에서 산다면 언어가 필요할까

집으로 돌아가 뜨거운 소나기를 맞도록 해
자정이 지나면 눈가에 얼음을 흘리면서
단단해질 수 있도록
얼음 틀을 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귓가에 접어 둔 쪽지, 눈가에만 말을 거는 입술 같은
허망한 일은 접어두고
단단히 식을 수 있도록
뜨거운 것은 빠르다

노인이 소년에 갇히는 것은 사랑에 빠졌을 때뿐
소년이 노인의 표정을 지을 때는 사랑에 갇혔을 때뿐

노인도 소년도 아닌 덩어리가 눈을 감는다 오래도록 남아 있는 주머니 속의 동전처럼 非行韻만으로는 아무것도 거슬러 줄 수 없다 그러니까 신을 거슬러 주고 싶다 잠에서 깨어날 때 뜨겁다는 말은 왜 차갑게 들리지 차가운 것은 어째서 금세 뜨거워질까 우리는 그것을 식어 간다라고 부르기로 한다 뼛속에서 바람이 분다 시리다는 말은 몸에 창문이 생긴다는 뜻이지 그것이 열려만 있다는 말

사랑은 불멸이고
우리가 죽는 거야
불길에 휩싸여 더 단단해지는 얼음이 있다
나는 일기를 너무 많이 빌려주었다

모든 사물은 떨리고 있다 당신은 말했었지 단단한 믿음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주 천천히 돌아서는 것일 뿐이라고 봄의 말을 하곤 금세 겨울의 초입이 된 사람 열리지 않는 믿음을 어떻게 믿기 시작할 수 있지 나는 아주 먼 후일에 그런 표정을 보기를 바랐다 찬 얼굴의 표면을 만질 때는 공중에 던져진 동전을 생각한다 떨어질 것이다 항상 전보다 더하거나 덜한 날씨들

내 잘못을 썰어 냉장고에 넣어 두고 잊은 적이 있다 잊으려고 그랬다 아주 오래전 소녀였던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음펨바, 눈물로 사람을 찌르려면 차가워져야지 얼었다 녹는 것을 반복하며 썩어간다는 것을 절기라 부르고 있다 핏물과 육즙의 차이를 생각하면서 감정의 마디가 굳어질 때까지 표현을 연습한다

-「음펨바 효과」 전문

시인은 언어의 질서를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 반드시 언어가 필요하다. “완벽한 세계에서 산다면 언어가 필요할까” 묻는 질문은 곧 이 세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기록에 남는 불경이 필요”한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아무리 마음속으로 신을 모독해봤자 그것이 언어를 통해 표현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제 “질병이 없으면 나아질 수 없다”(〈2〉)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시의 발생은 상대성에 의존하고 있다. 익숙한 질서에서 새로운 것을 길어낼 때 시가 태어난다. 따라서 시인은 “질서라는 하나의 기형을 사랑한다”(〈1〉). 그는 “질병과 함께 나아갈 것이다”(〈1〉). 이 모순은 마치 「음펨바 효과」와 같다.
‘음펨바 효과’는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같은 조건에서 냉각될 때 전자가 후자보다 더 빨리 어는 현상이다. 단순히 생각해서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음펨바 효과에 의해 “뜨거운 소나기를 맞”는 물체는 더 단단하게 얼어붙을 수 있다. 기존의 언어질서에서 탈피하기 위해 파괴적으로 그것을 재배치하는 과정을 거치면, ‘시’라는 고유하고 더 단단한 언어질서가 확립되는 것과 유사하다.
「B」에서 벌과 비를 B 아래 귀속시키는 비(B)가시적 상상력은 “구름을 번역하다 생긴 나머지 값”이다. 그것은 곧 구름을 언어로 전사하는 과정에서 상실되었던 실체들이다. 「음펨바 효과」에서, 본래 하나였을 농담과 슬픔이 “신”이 “푸줏간을 차려 놓고” 기다리는 “황혼녘”을 통과하며 분리된다. 머릿속에 덩어리 상태로 존재하던 농담과 슬픔이 신의 푸줏간, 언어의 질서를 통과하며 ‘나머지 값’을 상실한 채 분리되는 일이다. 비가시적 상상력을 긍정하는 시인에게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많은 잘못” 끝에 화자의 머릿속에는 “기억의 윤곽이 단단해”진 “얼어붙은 구름”이 존재한다. 잘못을 저지르라는 첫 행은 이제까지 시인이 보여준 탈피에 대한 열망과는 모순적인 명령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가시적 상상력의 상실은 「B」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립되는 것이지만, 완벽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독자들에게 시적 함축들이 제시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과정이다.
“중심을 벗어나려는 의지만이 중심을 세운다”(〈21〉)는 말은 곧 시인이 추구하는 질서의 탈피 역시 하나의 질서가 된다는 뜻이다. “눈물로 사람을 찌르려면 차가워져야” 한다. 얼음이 되어야 한다. 시인은 신에 대한, 질서에 대한 뜨거운 분노를 양분삼아 열정적으로 그것들을 파괴해나가며 시를 쓴다. “뜨거운 것은 빠르다”. 그의 언어들은 “음펨바”하며 무엇보다 빠르게 굳는다. “집으로 돌아가 뜨거운 소나기를 맞”으며, “눈가에 얼음을 흘리면서/단단해”져야 한다. “노인도 소년도 아닌 덩어리”는 생각한다. “오래도록 남아 있는 주머니 속의 동전처럼 非行韻만으로는 아무것도 거슬러줄 수 없다”고. “신을 거슬러 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언어로 옮기는 일이 필요하다. 시는 지면 위에 적히며 완성된다. 음소 단위로 이루어진 문자로, 통사구조로 이루어진 문장으로 사유가 전사되어야만 탄생하는 것이다. “불길에 휩싸여 더 단단해지는 얼음”처럼 시인은 탈질서의 욕망을 언어질서에 담금질한다. 극단 사이를 왕복하며 “감정의 마디가 굳어질 때까지 표현을 연습한다”. 기존의 언어질서는 파괴되며 김건영만의 새로운 언어, 시적 스타일이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음펨바 효과를 통해 만들어낸 얼음송곳이다. 시인은 언어와 시에 대한 통찰을 지나며 자신만의 시적 작법을 만들어냈다. 이제 손에 도구가 주어졌으니 사람을 찌를 차례다.


4. 얼음송곳

천치창조
여기 선지자의 메모가 있다

① 야간의 주간화
② 휴일의 평일화
③ 가정의 초토화
※ 라면의 상식화

기도합시다 R’Amen 모든 사람이 이러한 평등을 겪는 그날까지

라면의 화자
벌을 받는다면 신 앞에서 받겠다 재미없는 농담에 대한 벌만을 면은 꼬여 있다 모든 麵은 가까이에서 보면 꼬여 있지만 멀리서 보면 善이다 얼굴이 꼬여 있지 않은 사람을 보면 기분이 꼬인다 당신은 왜 꼬여 있지 않습니까 벌겋게 남은 국물 같다 나는 쉽게 달아오르고 사람의 배속으로 사라진다

저 화상
배를 가르고 나온 애비는 흰 종이였다
수술이 끝나도 깨어날 줄을 몰랐다
아버지가 누운 침대가 자라고 있다 적출된 간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나머지가 이제야 태어난 것을 알았다 모든 일에 프로가 되라고 하셨지요 나의 장래 희망은 프로쿠르스테스입니다 남은 평생 라면을 먹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짜파게티 요리사는 이렇게 말했다
라면은 요리가 아닙니다 불 앞에 선 나는 요리사가 아닙니다만 무엇인가를 끓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가 아닙니다 시는 죽었다 누군가 말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좋은 시 아닙니까 나는 이해라는 말이 웃깁니다 이해라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도 있는 거 아닙니까 너와 내가 뛰놀 때면 두 마리의 돼지를 떠올립니다 나는 신이 잘못 누른 버튼입니다 시는 죽었다 나는 身을 끓이고 있다 이것이 신의 몸이라면…… 나는 속을 끓이면서 눌어붙은…… R’Amen

난 爭議가 쏘아 올린 작은 鳳
비정규직이라고 합니다 일요일이니까 일을 합니다 用器가 있는 자가 라면을 얻는다 용기도 없어 가방 속에 컵라면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신은 언제나 일요일에만 있다 신이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일을 한다

범재와의 전쟁
눈이 올 때마다 생각한다 여기는 어쩌면 신의 재떨이가 아닐까 신은 가끔 여기다 침도 뱉는다 먹고 남은 컵라면 용기처럼 선한 사람들이 세상을 아름답다고 말할 때 나는 기도한다 R’Amen 나를 키운 것은 페라리 바람이었다 신이 있다면 제일 먼저 떠든 아이로 불려 나가 뺨을 맞겠다 당신이 끓인 라면이 이렇게 불었노라고 말하면서

“① 야간의 주간화 ② 휴일의 평일화 ③ 가정의 초토화 ※ 라면의 상식화”는 고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 수첩(비망록)에 적힌 메모로, 당시 비서실장인 김기춘의 지시 사항으로 추정된다. 「김기춘 ‘야간의 주간화⦁가정의 초토화…’ 살벌한 업무 지침」, 『한겨레신문』, 2016.12.13. 참조.
R’Amen: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교 신자들의 기도.

-「일요일 – 蛇傳 7」 전문


세밀한 부분까지 정밀하게 시어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아주 지난한 일이지만, 「일요일 - 蛇傳 7」이 중점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바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이 시의 대상이 관념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에서 대면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시에서 거론되는 ‘김기춘’이란 인명은 시를 현실 위로 단단하게 밀착시킨다. “나는 먹고 마시고 말한다”(「내생의 폭력」), “헌 법 줄게 밥 좀 다오”(음악 - 蛇傳 3), “이미 안전한 사람은 전선에 나오지 않는다”(「나의 크샤트리아」), “9원은 없다 1원론도 없다 있다면 그건 10원이다(0 - 蛇傳 0)” 같은 시구들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은 여러 시에서 삶과 직결되는 문장들을 지속적으로, 직접적으로 호출한다.
“선지자의 메모”는 고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수첩에서 따온 것이라고 각주에서 밝히고 있다. “① 야간의 주간화/② 휴일의 평일화/③ 가정의 초토화/※ 라면의 상식화”는 자본주의가 인간을 착취하는 온상을 보여준다. 착취가 일상화된 자본주의의 질서는 이미 질병화 되어 있다. 시의 맥락에서 불거져 나오는 ‘빈곤한 자들의 식량’으로써 ‘라면’의 이미지는 청각 이미지의 미끄러짐을 거치며 “R’Amen”에 도달한다. 화자는 “선지자의 메모”가 만인에게 평등해지는 날을 꿈꾸며 “R’Amen”을 읊조린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보여주는 구조적 불평등과 착취에 대한 분노어린 조롱이다. 화자가 “얼굴이 꼬여 있지 않은 사람을 보면 기분이 꼬”이는 것은 그가 “라면의 화자”이기 때문이다. 라면을 먹고 살아온 그의 몸은 라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라면을 끓이는 행위는 “身을 끓이”는 것이다. 라면과 가까운 화자의 인생은 꼬여 있다. 그러나 멀리 위치한 사람들의 인생은 꼬여 있지 않다. 그들은 화자와 달리 김기춘과 같은 ‘안온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서정주마저 안온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서정주 역시 일제강점기의 구조에 의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식으로 이야기하면, 그를 키운 것은 “페라리 바람”이다. “신의 재떨이” 같이 불평등한 세계에서 화자는 모두의 身을 공평하게 잘라버리기 위해 “프로쿠르스테스”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신이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일을 한다”. 착취를, 생의 고통을 겪는 이들을 외면하는 신은 믿을 수 없다. 화자가 믿는 것은 자신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라면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촉지할 수 있는 육체이며, 감지한 세계를 타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언어질서다.
「일요일 - 蛇傳 7」의 언어유희는 매우 현란하다. 끝을 알 수 없는 범위까지 의미가 확장되고 익숙한 언어들이 붕괴된다. ‘천지창조’가 “천치창조”가 되고 ‘짜라투스트라’가 “짜파게티 요리사”가 된다. 뻗어나가는 언어들이 현실의 문제들을 포섭하며 신문기사의 인용문마저 시구로 만든다. “이해라는 말이 웃”긴 이유는 누구도 시인이 정립한 새로운 질서를 완벽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시가 아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언어들이 일상의 언어에서, 일반적 언어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시는 소재나 주제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독자들은 시를 읽는다. 읽는다는 것은 글자를 감각하는 것이다. 언어는 시의 몸이다. 김건영의 시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들을 비틀고 꼬아서 늘어놓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낯선 모양과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 ‘낯섦’이 김건영의 텍스트들을 시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시집 『파이』는 질서란 질병을 극복하고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 위해 시인이 구워낸 파이(π)다. 하나의 기호 뒤로 무수히 펼쳐지는 숫자들처럼 한 권의 시집 안에는 분산되고 응집되며 쌓인 의미들이 있고 현실이 있다. 탈질서의 실천으로 쓰인 시들이 질서를 이루고 독자들을 기다린다. 과연 시인이 내민 얼음송곳은 사람들에게 유효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송곳에 찔릴 것인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파이』를 읽은 이들은 모두 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안심해도 좋다. 질병이 없으면 나아질 수 없다. 『파이』에 찔리면 흉터가 남는다. 그 흉터는 감각기관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질서를 새로운 형태로 감지하고, 파괴할 수 있는 새로운 감각기관. 김건영의 시집을 읽은 이들이 파괴자로 거듭난다. 『파이』로부터 파괴자가 증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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