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신춘문예] 새로운 여성주의 기표로서의 추상화

  • 손정
입력 2020.01.01 03:00

[미술평론 당선작]

1. 추상화에 입혀진 남성 신화
기호가 된 사진이 있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이 대형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 채 한 손에는 물감이 든 깡통을, 다른 손에는 붓을 들고 물감을 흩뿌리는 장면을 담은 흑백 사진 말이다. 르네상스 이래 캔버스는 이젤에 세워두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럴 때 캔버스는 화가와 같은 위치에서 그를 마주 보게 된다. 따라서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다는 것은 화가와 캔버스 사이의 대화적 관계가 파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캔버스를 바닥에 눕히는 폴록의 행위가 정복자적이며 마초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평가 해롤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가 그 역동성에 주목하여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고 명명한 이래 추상화가 갖는 남성적 이미지는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통념을 만들었다. 행위, 행동을 뜻하는 영어 단어 ‘액션(action)’은 곧 행동하는 남자, 수동적인 여자라는 이분법에 근거한 가부장적 통념을 회화에 투사시키며 추상화의 이미지에 남성성을 단단하게 투여했다.
또 하나의 사진이 있다. 사진 속에는 ‘액션 페인팅’을 하는 폴록이 있고 그를 가장자리에서 지켜보는 여성이 있다. 한때는 폴록처럼 야심만만했던 추상표현주의 화가였으나 그의 아내가 된 뒤에는 붓을 꺾고 폴록의 매니저로 살아가는 리 크래스너(Lee Krasner)이다. 카메라는 그녀를 아웃포커스한 채 작업실 구석에 위치 지웠다. 그렇게 이 사진은 작업하는 남성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면서 추상화에서 타자화, 주변화되는 여성 이미지를 고착화시키는 이미지가 되었다.
이브 클라인(Yves Klein)은 어떤가. 그가 추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여성은 작업실의 배경으로 밀려나는 데서 더 나아가 도구화되기에 이른다. 클라인은 여성의 신체에 물감을 묻혀 ‘인간 붓’처럼 사용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그리지 않고 여성들로 하여금 그리게 했다. 캔버스 위에 발가벗겨진 여성 둘을 세워 두 손을 마주 잡게 한 뒤 행위(액션)를 하게 했다. 그 행위란 바로 한명이 컴퍼스의 중심 다리처럼 곧추서곤 캔버스 바닥에 엎드린 다른 한명의 몸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돌리는 방법이다. 그러면 바닥에 엎드린 여성의 몸에 칠해진 물감이 흰 캔버스에 옮겨지며 액션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는다. 그런 방식으로 남성 화가인 클라인은 액션을 하지 않고도 추상화의 액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추상화는 남성의 미술이라고 어느 누구도 공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액션 페인팅을 하던 두 남성 화가의 이 마초적인 에피소드는 박제된 전설이 되어 전 지구적으로 퍼져 나갔다. 그 결과 추상화라는 세 음절의 기표는 힘, 근육질, 역동성 등 남성적인 젠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기호가 되었다.
추상화는 한국에서도 남성의 미술로 통념화되었다. 처음 그것은 청춘의 언어, 반항의 미술이었다. 해방 이후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수용은 기성 미술, 제도권 미술에 대한 반발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수상 경력에 따라 미술가를 서열화하는 미술계의 폐쇄적 권위주의, 식민지 시절부터 답습한 아카데미즘에 반발하는 청년 작가들이 들고 나온 전략은 국전에서 선호하는 구상 계열에 반대되는 추상화였던 것이다.
기표는 하나의 기의로 고정되지 않고 기표에서 기표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반항의 기호였던 추상화가 제도 권력이 된 것은 단색화에서였다. 단색화는 1975년 일본 동경화랑에서 ‘백색(白色)’에 주목해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가지의 흰색》전을 계기로 일련의 추상화가들 사이에서 생겨난 집단적 미술 경향을 말한다. 서구의 미니멀리즘 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주로 중성색의 단색을 썼다. 배경과 대상과의 구별을 없애 화면을 하나의 평면으로 취급한 점, 일정한 패턴이나 구성 요소가 반복되는 점이 특징이다. 단색화는 어느 사이 주류 미술이 되었고 1990년대 이후 문화를 통한 외교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술전시를 사용할 때마다 한국의 독자적 미술로 호출되며 제도 권력이 되었다.
그런 단색화에서는 가부장적 냄새가 난다. 남성 패거리 문화의 산물이기도 했지만 단색화를 둘러싼 담론에서 그랬다. 단색화를 옹호하는 담론뿐 아니라 심지어 비판하는 담론에서도 남성의 냄새가 났다. 단색화 제작에는 캔버스에 점과 선을 되풀이 칠하거나(이우환), 연필로 무수히 선을 긋거나(박서보), 물감을 떼어내고 붙이는 행위를 반복하거나(정상화), 캔버스 뒤에서 물감을 밀어내 앞으로 나오게 하는(하종현) 등 다양한 신체적 행위가 반복 수반된다. 남성으로만 이루어진 단색화 작가들은 이러한 제작 방식을 집단적 특성 삼아 영토화했고, 그 땅으로 어떤 여성 작가도 넘어가지 못했다. 단색화의 등장 초창기에 그러한 작가적 행위는 조선 도공의 물레질에 비유되었는데, 이러한 비유는 일제 강점기, 조선 미술의 특질을 조선 도자와 관련지어 ‘비애(悲哀)의 미’로 규정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의 ‘백색 미학’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그러자 2010년을 전후해서 단색화를 옹호하는 연구자들은 제작 과정에서 일어나는 작가의 신체적 행위를 사대부 수신(修身)에 비유함으로써 단색화를 중도(中道)의 유교적 미학으로 끌어올렸다. 단색화 작가들의 제작 행위가 도공의 무심한 물레질에 비유되든, 선비의 유교적 자기 수양에 비유되든 그곳은 여성이 범접하기 어려운 남자들만의 세계였다.

2. 남성적 추상 세계에서 일어난 여성적 균열
그러나 지금 한국 추상화라는 기표는 다시 새로운 기의를 만들어내며 미끄러지는 중이다. 그렇게 새로운 기의를 만들어내며 기존 남성중심적 질서를 중심으로 구축된 추상화의 세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남성 미술 신화에 얼룩을 묻히고 있는 세 명의 여성의 작가가 있다. 정직성(b. 1976), 신민주(b. 1969), 제여란(b. 1960)이 그들이다.
이들은 추상을 자신들의 회화 전략으로 채택한 중년 여성 작가지만, 어떤 선언이나 집단적 모색을 하지도, 페미니즘 미술과의 상관성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개별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본능에, 혹은 삶의 조건에 충실하게 반응하면서 자신들의 감각과 일상 세계를 추상화로 담아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추상화를 그리는 동시대 여성 작가‘들’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최욱경(1940-1985)처럼 홀로 반짝이던 여성 추상화가가 끝내 한국 추상화의 세계에서 뚜렷한 부피감을 갖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그녀와 함께할 동시대 여성 추상화가들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비록 이들 세 여성작가들이 단일 집단을 이루지 않은 채 각자의 개별 작업에 몰두한다고 하더라도, 여성 추상화가로서의 동시대적 존재성만으로도 ‘성좌(星座)’를 만들며 한국 미술계의 새로운 징후로 포착될 가능성은 크다.
이들은 지금까지 남성적 회화 언어로 이루어진 추상화를 각자의 고유한 작업 방식을 통해 ‘전유(Appropriation)’한다. 이를 방법적 탈취(奪取)라 불러도 좋으리라. 저항에는 전유와 거부,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이때 전유란 그 자체로 집단행동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제각각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전유는 예기치 않게 집단성의 힘을 발휘한다. 이 세 여성작가들의 추상이라는 방법론은, 그 집단적 성격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해방 이후 한국 추상화를 영토화했던 남성중심적 질서를 재영토화함으로써 추상화의 세계에 새로운 여성적 기호를 식목(植木)할 수 있게 했다.
지금까지 페미니즘 미술에는 여성 서사가 존재해왔다. 그것은 구체적인 형상과 이야기, 혹은 여성적 상징을 통해 이루어졌다. 1980년대에 결성된 한국 1세대 여성주의 미술가 집단인 ‘시월모임’ 구성원들인 김종례(b. 1946), 김인순(b.1941), 윤석남(b.1939)은 추상화를 거부하고 구상미술을 택한다. 윤석남은 “저는 어머니를 그려왔다. 근데 그때는 잘 아시다시피 한국 화단이 전부 추상회화 일변이었다. 완전히 앵포르멜이거나 모노크롬도 하고. 나는 어머니 얘기를 하려면 추상회화론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1] 이들 페미니즘 미술가들이 구상미술을 선호한 이유를 짐작게 한다. 추상을 중심으로 구축된 한국 미술의 가부장제에 저항하기 위한 대항적 언어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구상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들 1세대 페미니즘 미술가의 작품을 대표하는 어머니, 여성 노동자, 한복 저고리, 신사임당, 신여성 등과 같은 도상(圖像)들은 여성 서사와 여성적 메시지를 위해 동원된 것들이다.
정직성, 신민주, 제여란의 작업은 앞서 살펴본 페미니즘 작가들의 구상(具象)과 달리,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여성 서사나 여성 상징도 없이 오직 추상적(抽象的) 미술 언어만으로 여성주의적 질감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들은 분명 어떤 점에서 기존 한국 페미니즘 미술과의 연계성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 미술의 구상성보다는 추상성을 방법적 전략으로 선택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페미니즘적 스탠스를 ‘저도 모르게’ 취하게 된다. 게다가 이들은 공식적으로 페미니스트 작가임을 표방한 적도 없다. 이들 세 작가를 페미니즘 작가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작품은 페미니즘 미술이라고 할 수 없단 말인가. 서둘러 말하자면 아니다.
작품은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독자의 것이 된다. 해석은 독자와 비평가의 몫이다. 물론 성별과 장르가 같다는 이유로 이 세 작가의 작품에 페미니즘적 코드를 들이대는 것은 어쩌면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질문들은 집요하게 나의 혀끝을 맴돈다. 이들의 캔버스 표면에서 공통적으로 전개되는 ‘추상 기질’에는 어떠한 여성적 메시지도, 여성적 세계도 없는 걸까. 그들이 페미니즘적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고 해서 붓질과 붓질의 틈새 혹은 붓질 너머에서 ‘여성적인 그리기’가 간취될 여지는 없는 걸까.
구조주의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두 가지의 기본 층위로 되어 있다. 보이는 세계는 이른바 표면 현상들(surface phenomena)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보이지 않는 세계는 구조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조들은 그러한 표면 현상들의 근거와 토대를 이루고 있기에 구조를 체계적으로 조직해냄으로써 우리가 그러한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2] 이들 세 여성작가들은 분명 서로 다른 색채와 억양, 방법과 태도를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품에는 동질적인 삶의 조건에서 발원하는 리듬과 호흡, 감정 등이 감각된다. 이들의 서로 다른 추상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의 무언가를 상상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여성주의다. 그들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간에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이들 세 작가의 서로 다른 캔버스 표면의 심층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지탱해주는 공통의 구조로서의 여성주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3-1. 정직성, 위안의 언어
정직성에게 색은 어떤 심리적 상태를 드러내는 역할을 해왔다. 특히 2000년대 선보인 <연립주택> 시리즈의 붉은 색 모노톤은 ‘울화’의 발현으로, 그것은 일차적으로 집을 소유하지 못해 이사를 밥 먹듯이 해야 했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그런데 속이 답답해서 일어나는 화병을 일컫는 울화는 여성의 참을성을 미덕으로 여겨왔던 가부장제적 유교 사회에서 억압받았던 여성에게 더 잘 어울리는 심리 용어다. 그런 점에서 정직성의 붉은 색 모노톤에서 발견되는 울화는 한국 여성 특유의 우울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오장의 꾹 막힌 곳에서 치솟는 울화를 토해내듯 캔버스 화면 전체를 물들이는 붉은 색은, 바로 그 붉음(reds)으로 인해 약자의 입장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해석을 가능하게도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부자 컬렉터들은 그녀의 ‘빨간색’을 부의 상징으로 오독했지만 말이다.
<연립주택>시리즈를 통해서 추상화로의 이행 가능성을 예고했던 정직성은 2010년을 전후해 <기계> 시리즈를 전개하면서 회화의 추상성을 더욱 밀어붙였다. 기계의 형체는 점점 뭉개져 단순화된 곡선의 형태로 유동하고, 기계의 색은 고유색을 점점 버리고 심리를 표상하듯 파스텔톤화 되어간다. 그리하여 기계는 본디의 고체로서의 물성을 탈각하고 액화되어 흐르는 것 같다.
기계는 남성의 세계다. 산업화 이래 여성들은 가정에 남겨진 채 경제적 노동에서 소외됐다. 남성들은 공장으로 나갔고 그곳에는 기계가 있었다. 처음 그가 다룬 기계는 부산 항만시설의 대형 기계들, 컨테이너 등과 같이 중공업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때 그녀의 그림 속 기계의 형태는 기계의 재현에 가까웠다. 금속성을 연상시키는 황량하고 불안한 파란색 톤으로 그려진 기계는 산업사회의 비정함,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것 같았다. 그런 <기계> 시리즈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2011년 무렵부터다. 이제는 중후한 중공업 산업기계보다는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교통수단인 자동차, 버스, 트럭 등의 엔진과 부품 더미가 그녀의 캔버스 안에 들어왔다. 엔진은 열에너지를 기계적 에너지로 바꿔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핵심 장치로 자동차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직성의 그림 속 자동차 정비공의 수리를 기다리는 엔진은 무정한 회색이 아닌 파스텔톤으로 화사해지며 구불구불한 엔진 기계는 유려한 붓질로 칠해져 인간의 장기처럼 피돌기를 하는 듯 온기가 느껴진다. 그 때문일까. 그녀의 그림 속 다양한 엔진들은 역동적인 거대한 에너지라기보다는 힘겹지만 따뜻한 일상을 이끄는 소박한 동력처럼 읽힌다.
정직성의 그림에는 진짜 기계처럼 보이게 하려고 음영을 넣는 것과 같은 재현 트릭이 없다. 제목도 <201447> <201448>과 같은 숫자를 써서 관람객이 어떤 형상이나 메시지도 떠올릴 수 없게 한다. 그녀는 오직 경쾌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리드미컬한 붓질로 모종의 심리를 전하고자 할 뿐이다. 그녀의 기계 연작에는 기계의 기억을 어슴푸레 간직한 듯 적당히 형체가 뭉개진 곡선 아래로 주황, 파랑, 보라 등 원색이 깔려 있다. 보통 화면에서 온기를 배가시키는 힘은 밑색에서 나온다. 정직성의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다. 밑색이 윗색보다 명도와 채도가 높아 위로 튀어나오는 것 같은 색채의 역전 효과 덕분에 화면 전체에 생기가 흐른다. 주황은 기분 좋고 파랑은 명랑하고 진분홍은 발랄하다. 밑색과 윗색의 경계 부분에서 생기는 긴장감은 화면 전체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작품을 보는 관람자는 위로를 얻게 된다. 그것은 차가운 기계가 대변하는 비정한 현실을 근저에서 보듬는 어머니의 품 같은 색이다. 정직성은 단색화에서처럼 모노톤을 구사하지만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결핍된 따뜻함이 있다. 일상의 우울과 절망감을 단박에 기쁨과 긍정, 위로로 바꾸는 여성적 힘이 추상화된 정직성의 기계 시리즈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정직성의 붓질은 활기차면서도 부드럽다. 안 그래도 밑색이 군불을 지피는 듯한데, 붓질의 터치가 주는 부드러움이 더해져 삶에 대한 이중 긍정의 힘이 있다. 작가는 캔버스에 배경을 칠할 때는 백붓(넓은 납작붓)을 사용해 넓게 펴 바른 뒤 그 위에 작은 붓으로 기계의 몸체를 연상시키는 형태를 그린다. 유채 물감에 수성인 아크릴 물감을 섞음으로써 터치하기가 한결 가볍다. 그것은 ‘행위의 반복을 통한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통상 ‘행위의 반복을 통한 물질의 정신화’로 비유되는 단색화의 붓질과는 다르다.[3] 정신화란 곧 선비의 자기 수행을 통한 유교적 이념의 실현에 비견되곤 했다. 생활감각과는 상관없는 저 높은 곳의 관념세계다. 하지만 정직성의 회화는 회사원의 출퇴근길, 자영업자의 영업 동반자로 함께 하다가 고장 난, 그래서 수리를 기다리는 차의 엔진과 각종 부품의 세계를 다룬다. 그래서일까. 형체를 지워나가는 그녀의 추상적 붓질은 서민의 삶의 피곤함을 어루만져주는 여성의 손길을 연상시킨다.
정직성의 회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선택한 추상화적인 붓질이 여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채택한 회화 작법이라는 데 있다. 육아와 작업을 병행하는 주부 작가의 삶은 녹록지 않다. 정직성이 결혼과 출산 이후 오랜 작업 시간을 요구하는 정교한 붓질 대신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하고 성긴 바느질하듯 듬성듬성 칠하는 방식을 선택한 이유다. 그럴 때 사물의 디테일은 포기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정직성의 그림에서 형상성은 마모되며 전문가만이 엔진의 차종을 겨우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추상화된다. 어쩌면 그의 추상화야말로 주부 작가의 회화 언어로서 최적성을 획득한 예가 아닐까.

3-2. 신민주, 분노의 언어
화면 위에 넓게 펴서 그린 어두운 선들이 즉흥적이면서 강렬하며 거침이 없다. 주변으로 물감이 흘러내리고 뭉개져도 작가는 개의치 않는다. 그에게는 어떤 형상이나 풍경을 재현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 오직 몸 깊숙이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캔버스 표면에 표출하고자 한다. 그것은 분노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따르면 남성이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표출하는 감정이 분노이다. 그것은 여성적 감정으로 규정되어 온 울음의 반대편에 있는 심리 상태이다. 그런데 여성화가 신민주의 화면에서는 울음이 아닌 분노가 폭발한다.
그런 에너지는 스퀴지(squeegee)에 빚진다. 신민주는 밑색을 칠하거나 형태를 잡을 때 붓을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스퀴지로 그린다. 스퀴지는 판화인 실크스크린을 할 때 쓰는 인쇄 용구인데 평평한 목판에 고무로 된 두꺼운 판의 날(刃)을 붙인 것이다. 신민주는 원하는 색이 종이 표면에 넓게 묻히도록 하는데 효과적인 판화 도구를 회화에 가져옴으로써 몸의 감정을 캔버스에 더 직접적으로 옮겨 실을 수 있게 된다. 작가가 선호하는 캔버스 크기는 150호 정도의 대작이다. 손이나 팔을 써서는 안 되고 몸을 실어야 감당할 수 있는 크기. 그렇게 큰 캔버스에 감정을 분출하는 데는 어쩌면 스퀴지가 붓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그는 목적 없이 붓질을 해 형태를 구축하고 그것을 스퀴지를 써서 한 호흡에 파괴한다. 두텁게 물감을 얹어 스퀴지로 밀어낸 결과는 협객의 일격처럼 단호하다. 농축된 감정의 응어리 같은 검정과 갈색, 그리고 흰색 물감을 올린 뒤 스퀴지로 밀어내면 화면에는 모시의 올이 풀려나가듯이 억눌렸던 것들이 한순간에 풀린다. 그 속도감의 흔적은 쾌감마저 동반한다. 분이 삭히지 않을 때는 한바탕 해원(解冤)이라도 하듯 스퀴지로 이리저리 휘몰아친다. 작가는 대개 장수가 전장에 나가기 전 호흡을 가다듬는 것처럼 밑색을 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밑색 작업도 생략한 채 캔버스에 바로 선을 그어 분노의 감정을 분출한다. 마치 추상이 본능인 것처럼.[4]
작가는 “내 안에 있는 분노와 고통을 표출했다. 추상은 인생을 담기에 아주 적절한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가. 그는 캔버스를 눕혀 장악하기보다 마주 보고 작업한다. 돈키호테가 창을 들고 적을 향해 돌진하듯 스퀴지로 캔버스를 대적하는 것이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 ‘부리아레오’라고 생각하고 달려갔듯이, 신민주에게 캔버스는 분노라는 감정의 배설구이다. 아니, 그녀의 분노를 자아낸 이 세계의 현현(顯現)이다.
그런데 도대체 신민주의 분노는 어디서 발원하는 것일까. 그가 던진 ‘분노’와 ‘고통’이라는 두 단어가 열쇳말이 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여성에게 인생의 고통은 삶의 변곡점인 결혼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영역 등 눈에 보이는 분야에서의 억압에 그치지 않고, 무의식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억압으로 이어진다.[5] ‘82년생 김지영’에서 보듯 여성은 결혼과 함께 아내, 며느리, 엄마라는 3중의 역할을 떠맡으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그녀의 자아의식은 억눌릴 수밖에 없다. 그 정체성을 부여잡는 것이 힘겨워질 때 느끼는 공허함이라니. 분노는 그 텅 빈 마음의 극한에서 화산처럼 분출한다. 그렇게 공허함의 끝에서 그 억압적 세계를 뚫고자 하는 것이 ‘추상 본능’으로 나온 것은 아닐까. 작가는《추상 본능》전(展)에 내놓은 2016∼2017년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불확실한 공허(Uncertain Emptiness)’라는 제목을 붙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참혹한 경험을 한 뒤 실존의 고민 끝에 추상화가 나타났듯이, 여성의 억압된 삶의 조건에서 터져 나온 것이 추상화다. 그렇게 볼 때 추상화의 바다 밑에는 여성으로서의 보편 서사가 흐른다.
신민주는 덧바른 물감의 중층적인 표면을 스퀴지로 밀어내는 작업을 설명하며 ‘갈아엎는다’는 표현을 쓴다.[6] ‘갈아엎는다는 것’은 한판 뒤집어보자는 삶의 자세다. 그렇다면 어쩌면 결혼한 여성 작가에게 그런 자세는 ‘야망과 열정이 결핍된 번지르르한 평범함, 무한히 반복되는 목적 없는 나날’을 갈아엎고 스스로 위대해질 기회를 향해 돈키호테처럼 돌진하고 있는 몸의 동작으로 표출되는지도 모른다.[7] 그 심드렁하게 가라앉은 중성색 위로 펼쳐지는 스퀴지의 퍼포먼스는 그래서, 직진이다. 필사적인 돌진이다.
신민주가 구사하는 색은 포스트단색화 작가로 분류해도 좋을 만큼 중성색의 단색을 주로 쓴다. 블랙과 화이트, 갈색 등의 색깔은 단색화와 유사하지만, 단호하고 일회적인 붓/스퀴지의 터치는 단색화의 자기 수양적인 태도로 천천히,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제작 방식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 단호함과 속도감 때문인지 단색화가 주는 느낌과는 매우 다르다. 가라앉은 중성색의 단색과 단호하고 속도감 있는 붓질/스퀴지의 대비는 마치 기존의 정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단색화의 세계를 조롱하는 것 같다. 이 색채와 붓질의 불균형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억눌린 여성의 분노에 다름 아니다. 신민주의 작품을 기존의 남근 중심적이고 로고스 중심적인 언어가 아닌, 여성적 육체와 감각의 언어로 읽어야 하는 이유다.
유교 사회에서 분노는 여성에게 허락된 감정이 아니었다. 서양에서도 여성에게 분노는 긍정의 감정의 아니라 ‘히스테리(hysteria)’로 오도되었다.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 ‘hystera’가 어원인 히스테리는 여성 특유의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정신 장애를 가리키는 말로서, 감정과잉과 극도의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요약된다. 억압적 현실에 분노하는 대다수 여성들은 히스테리 환자로 취급되면서, 여성의 분노는 치료되어야 할 질병이 된다. 그러나 신민주는 작품 안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다. 그렇게 신민주는 남성의 감정으로 할당된 분노를 여성적으로 전유함으로써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3-3. 제여란, 환희의 언어
제여란이 구축하는 화면에는 자연이 있다. 고충환이 그의 작품 세계를 ‘회화자연’이라고 명명했듯이[8], 각각의 계절 감각을 일깨우는 장면들은 제여란의 회화 작업에서 영감의 원천이 된다. 놀라운 것은 그가 자연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구상이 아닌 추상을 택했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자연으로부터 받은 감흥을 심리적으로 재현한다. 비, 공기, 폭풍우, 꽃, 하늘 등 자연이 주는 온갖 감각이 캔버스 위에 휘두르는 몸놀림을 거쳐 추상화된다. 재현이 아니므로 위, 아래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지 종잡을 수 없다. 그녀의 작품은 감각하는 자연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 제여란의 캔버스가 모노크롬적인 색을 구사하는 앞의 두 여성작가와 달리 천연색의 난장인 것은 그 때문이다.
제여란 역시 붓이 아닌 스퀴지를 사용한다. 신민주의 스퀴지 동작이 무예에 가까운 직진의 권법이라면 제여란의 액션은 즉흥적인 춤에 가깝다. 영국의 연극학자이자 기호학자 파트리스 파비스(Patrice Pavis)는 제여란의 작업 과정을 잭슨 폴록 식의 액션 페인팅과 연결시키며 “(미국 현대무용가)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의 즉흥 안무”에 비유한 바 있다.[9]
제여란은 캔버스에 칠하는 첫 색을 즉흥적으로 선택한다. 창밖에 핀 꽃, 저녁 무렵 바람의 푸근함, 훅 끼치는 여름비의 향기 등, 어떤 순간의 깨달음이 처음 찍는 물감의 색을 정한다. 첫 색에 따라 다음 색이 더해지고 더해지는데,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그도 예측하지 못한다. 노랑과 갈색, 빨강과 초록, 빨강과 파랑, 파랑과 검정 등 그가 즉흥적으로 골라서 캔버스 위에 올린 원색의 물감 덩어리들이 휘몰아치는 스퀴지의 동작에 따라 환호하듯 서로 섞이고, 흐르다가 밀리고, 쌓이다가 깎이며 만들어내는 퇴적층 같이 두터운 물감의 두께. 그것은 마치 외계인이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의 지층 같다. 그러면서도 색의 배합과 제스처에 따라 생긴 캔버스의 흔적은 각기 다른 계절적 감각을 상기시킨다. 이를테면 분홍과 초록의 배합에서는 ‘칼을 대자 기다렸다는 듯 환호하며 열리는 수박의 자발적 기쁨’이[10], 파랑과 검정, 흰색의 배합에서는 주먹만큼 큰 별들이 걸렸던 겨울 새벽 하늘이 준 경이(驚異)의 기억이 소환된다.
제여란이 바닥에 눕힌 캔버스 모서리를 가운데 두고 양 다리를 쫙 벌린 뒤 몸을 구부려 어깨보다 훨씬 넓은 길이의 스퀴지를 마구 휘두르는 동작을 찍은 사진을 보라. 이것은 새로운 기호다. 여기서 우리는 폴록에게서 발원하는 추상화는 남성적 회화라는 젠더 신화가 얼마나 허구였는지 깨닫게 된다. 젠더란 젠더 호명 행위에 의해 수행되는 것일 뿐 섹스(성)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정체성 이론’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신체란 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변화해가는 것이다. 젠더는 결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다. 제여란의 그 유려한 추상화 액션 페인팅 사진은, 추상화가 더 이상 남성만의 회화가 아니라는 선언서로 보기에도 손색이 없다. 그리하여 추상화는 마침내 성별의 차이를 넘어, 모든 젠더의 것이 된다.
제여란이 남성적 액션 페인팅을 탈취해 구축한 화면이 결과적으로 자연과 계절을 노래하는 회화이며 생태적 감각을 유발한다는 것은 반전이다. 제여란은 “붓은 표현이 구체적이다. 몇 번만 붓질을 해도 뭔가를 연상시킨다.”며 자신의 스퀴지가 붓의 구체성과는 다른 추상성의 도구임을 암시한다. 그 결과 제여란의 그림은 자연을 구체적으로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우리의 생태적 감각을 자극함으로써 특정한 자연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그가 작품을 통해 환기하는 자연에 대한 감각이나 기억은 침울함, 권태로움, 혹은 공포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끄집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휘몰아치듯 춤추는 그의 스퀴지 동작에는 우리의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열락(悅樂)이 있다. “여성의 몸에서 솟구치는 구속받지 않은 기쁨의 활력과 저절로 연결되는” 제여란의 스퀴지 동작, 그 결과로써 구현된 추상화가 주는 기쁨과 환희의 감정은 “여성의 삶의 원천은 여성 스스로가 힘의 원천이자 생기의 원천이 되는데 있다”고 주장한 페미니스트 엘렌 식수(Helene Cixous)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11]
그녀는 근년에 제작한 작업 시리즈에 ‘어디든, 어디도 아닌’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역설적으로 그 제목은 독일의 페미니스트 우테 에어하르트(Ute Ehrhardt)가 21세기의 여성상으로 나쁜 여자가 되기를 권하며 내건 캐치프레이즈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을 연상시킨다. 제여란은 최고의 컨디션일 때 작업을 함으로써 자연이 주는 열락에 가까운 자극과 감각에 인도되어 아무런 제한도 없이 ‘어디든, 어디도 아닌 곳’으로 가고자 한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듯이, 여성들은 문화 속에 자연을 가져가야 한다. 제여란의 작품에서도 자연은 문화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포함한 모든 것으로 보인다. 그럴 때 자연/문화의 이분법은 해체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적 대립쌍과 연동된 여성/자연이라는 고정관념 또한 자연스럽게 해체된다. 그런 점에서 제여란의 자연-난장은 단지 어머니 대지로 상징되는 자연을 여성화하는 데서 더 나아가 자연에 고정된 성별을 해체하고 모든 젠더들이 숨 쉬는 공간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4. 몸의 언어, 생명의 언어로서의 추상
새삼 묻는다. 추상화는 남성적인가. 당연히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추상화의 영역에 들어간 여성 작가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기 때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런 질문은 더 이상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추상화는 여성적인가. 당연히 아니다. 정직성, 신민주, 제여란의 추상화 작업에서 여성주의적 그리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추상화를 여성적인 것으로 전유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점에서 여성 추상화에 대한 여성주의적 해석이 요구되는 것은, 지금까지 남성적 문법과 질서를 중심으로 배타적으로 구축된 추상화가 여성적 균열을 통해서만 비로소 더 심오하고 확장된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직성, 신민주, 제여란에 주목하는 이유다. 이들 세 작가에게는 여성적 뉘앙스를 띤 추상미술 언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몸의 언어, 감정의 언어다. 정신과 이성이 아닌, 몸과 감정의 회화는 이성 중심의 모더니즘 시대가 아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 평가를 받기 시작한 회화의 내용이자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세 작가는 그 남성적 영토에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새로운 이주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리고 각자 자기만의 몸의 언어를 통해 심리적 추상화를 그린다. 누군가는 위무하듯, 누군가는 분노해서, 또 누군가는 환희에 차서.
여성적인 것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에 따르면 언어에는 두 가지 차원, 즉 상징계와 기호계가 있는데, 그 중 상징계는 상징적 아버지의 질서이자 하나의 기의에 고정되지 않은 기표의 자유로운 미끄러짐을 거부하는, 일의적(一意的) 언어의 세계다. 반면에 기호계는 우리의 감정 및 신체적 충동이 아무런 제재 없이 자유롭게 발산되는 차원이자 유아가 거세 공포를 느껴 어머니와 분리되기 전에 어머니와 애착을 형성했던 세계다. 그곳에서는 언어가 아니라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리듬, 억양, 소리, 반복, 옹알이, 음파 등으로 소통한다. 이 언어 이전의 세계인 기호계는 가부장제가 길들일 수 있는 언어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며 새로운 기표의 생성을 허락한다. 이들 세 여성작가의 추상화는 바로 이러한 기호계에 속하는 측면이 있다. 어떤 서사나 메시지 없이 관념적 지향성 없이 여성적 일상에 자신들의 몸을 밀착한 채, 아무런 규범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자신들의 감정, 즉 위로와 분노와 환희의 감정을 표출한다. 그래서 이들의 추상화를 보는 관람객들은 캔버스 표면에서 붓질과 스퀴지가 만드는 어떤 억양, 리듬, 속도 등을 통해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의사소통을 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남성적 추상화에 더해 여성주의 추상화라는 새로운 기표를 생성하며 추상화의 영토를 확장한다.



[1]경기도미술관 ‘시점時點·시점視點-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2019.10.29-2020.2.2) 윤석남 인터뷰 영상 중에서.
[2]로이스 타이슨, 윤동구 옮김, 『비평 이론의 모든 것』(도서출판 앨피, 2012), 442쪽.
[3]윤진섭은 단색화 작가들의 화면에는 반복적 행위의 결과 무한한 정신성이 창출된다며 이를 조선시대 선비의 수신의 유교적 덕목과 연결지어 ‘주역에 기초한 우주의 순환 원리’로 해석했다. 윤진섭, 「마음의 풍경」,『한국의 단색화』(국립현대미술관, 2012), 10-16쪽.; 이용우도 수행으로서의 신체적 행위를 강조하며 기교의 절제를 통한 정신적 자연관, 동양의 수묵 전통과 연결 지었다. Youngwoo Lee, "Dansaekwha: From Form to Context", DANSAEKHWA(Kukje Gallery: Seoul, Tina Kim Gallery: New York, 2015), 11-12쪽.
[4] 서울 종로구 PKM갤러리에서 2018년 2월 28일∼3월 29일 개최된 신민주 개인전 제목이 ‘추상 본능’이다.
[5] 로이스 타이슨, 위의 책, 225쪽.
[6] 이선영, 「생성과 소멸이 서로의 조건인 세계」,『추상 본능(Instinct of Abstraction)』도록(PKM갤러리, 2018), 2쪽.
[7] 로즈마리 퍼트남 통, 이소영 옮김, 『페미니즘 사상』(한신문화사, 2000), 351쪽.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결혼에 대해 정의한 표현에서 가져왔다.
[8] 고충환, 「회화 자연, 어디든 어디도 아닌」,『서울아트가이드』(김달진미술연구소, 2019). 아래 홈페이지 참조.
https://www.daljin.com/?WS=25&BC=cv&amp;DNO=16085
[9] 파트리스 파비스, 「제여란의 회화의 세계」, 『제여란: 그리기에 관하여』(미메시스, 2017), 38쪽.
[10] 숨은 보석 같은 문장가 고(故) 김서령을 추억하며 그가 음식에 대해 쓴 탁월한 에세이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푸른역사, 2019)에서 문장을 땄다.
[11] 로이스 타이슨, 위의 책,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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