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섬·잡채밥처럼 새해엔 맛있게 어우러지세요

조선일보
입력 2019.12.31 03:01

[41년 차 중식의 대가 여경옥]
1월 1일 음식 하면 떡국? 낯선 재료가 조화롭게 섞인 양장피도 새해에 딱이죠
세계적 미식 가이드에 오른 롯데호텔 '도림'의 총괄 셰프… 우리나라 중식 중에선 유일

경력 41년 차인 중식의 대가 여경옥 셰프.
경력 41년 차인 중식의 대가 여경옥 셰프.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매년 1월 1일이면 그의 무쇠팬(웍·wok)엔 쉴 새 없이 불이 붙는다. 숨돌릴 틈도 없다. 다들 이날 떡국만 먹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가족·친지 다 같이 가장 만만하게 찾아오는 곳이 다름 아닌 중식당. 41년 넘게 활동하며 중국 음식의 대가로 불렸고, 현재 롯데호텔 중식당 '도림'을 이끄는 여경옥(56) 셰프는 섣달 그믐날과 정월 초하루까지가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다.

"공휴일·명절 개념이 아예 사라졌어요. 특히 이맘땐 생선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생선이라니? "중국어로는 물고기 어(魚) 자가 여유 있을 여(餘) 자랑 발음이 똑같아요. 중국에선 연초에 생선 요리를 먹으면 돈이든 시간이든 인간관계든 한 해가 여유롭고 넉넉해진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신년 요리로 종종 생선을 준비하죠. 올해는 가자미를 얇게 포를 떠서 뼈는 튀기고 그 위에 생선살을 올려 먹는 량츠(兩吃)를 만들어 봤어요." 말끝에 그가 빙긋 웃었다.

여경옥이 지휘하는 '도림'은 올해 프랑스 정부가 주관하는 세계적인 미식 가이드 '라 리스트 2020'에 이름을 올렸다. 전 세계 1000개 레스토랑을 뽑은 것으로, 미쉐린 가이드보단 대중에게 덜 알려져 있지만, 나라가 주관하는 미식 가이드인 만큼 엄정하게 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라 리스트 2020'에 오른 우리나라 레스토랑은 22곳. 이 중 중식 레스토랑으로는 '도림'이 유일하다. 여경옥은 "기분은 좋지만 나만 올라서 서운하다"면서 "한국 중식이 더 나은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일을 시작한 건 중학교를 갓 졸업한 열여섯 살 때였다. 화교 출신인 그는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했다. "칼국수, 빈대떡, 수제비처럼 배급받은 밀가루로 해먹을 수 있는 음식만 먹었어요. 너무 많이 먹어서 마흔 넘어서까지 칼국수는 입에도 안 댔어요." 돈을 벌어야 했다. 인천의 한 중국집에서 배달일을 시작했다. 인천에서 영등포, 서울역 인근 등으로 옮겨가며 가게에서 먹고 자고 일했다. 아침 8시에 눈을 떠 밤 11시쯤 자리에 누웠다. "주방에서 접시닦이로 일하면서도 끊임없이 곁눈질로 음식을 배웠어요. '하루에 메뉴 1개 공략'이 목표였습니다." 한 달에 하루 이틀 쉴 땐 메뉴판을 가져다가 재료와 조리법 등을 깨알같이 적었다. "소림사 무술처럼 수련한 거죠. 100% 내 요리를 시작했다 싶은 건 10년이 넘은 뒤였습니다."

'도림'의 시그니처 딤섬 4종.
'도림'의 시그니처 딤섬 4종. 게살과 야채를 소로 넣은 춘권과 새콤달콤한 칠리소스. 찜통 안에는 송로버섯교자, 새우 교자, 돼지고기와 새우가 들어간 쇼마이.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가지와 가지 사이에 다진 새우를 넣고 튀긴 후 사천식 어향 소스를 뿌린 '어향소스가지새우'.
가지와 가지 사이에 다진 새우를 넣고 튀긴 후 사천식 어향 소스를 뿌린 '어향소스가지새우'.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1984년 스물두 살에 신라호텔에 경력직 세컨드 셰프로 입사했다. 면접을 6차까지 봤다. 1999년 신라호텔 중식당 '팔선' 책임주방장이 됐다. 남들은 파란(波瀾)이라 했지만, 그에겐 오래 웅크렸다 기지개를 켰을 뿐이었다. 2013년에 '도림'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경옥 셰프는 "아직도 넉넉하게 먹는 것에 집착한다. 그래서 중식이 좋다"고 했다.

그에게 새해 다 같이 모여 만들어 먹기 좋은 음식은 어떤 것인지 물었다. 뜻밖에도 잡채밥과 양장피를 꼽았다. 당면을 데친 다음 볶고, 또 한 번 양념에 무쳐주는 한식 잡채보다는 중식 잡채가 오히려 간단하다고 했다. "기름에 간장과 굴 소스를 살짝 볶은 다음 데친 당면과 야채·양파·당근·고기 같은 냉장고 속 재료를 대충 채 썰어 다 함께 센 불에 2~3분 볶아주면 완성이에요." 양장피는 뜨겁고 차가운 것, 해물과 고기, 생것과 익은 것이 조화롭게 섞여서 좋다고 했다. "새우나 오징어는 삶아서 물기를 빼고, 소고기는 살짝 밑간해서 볶아두고 오이나 파프리카·당근 같은 각종 채소를 취향 따라 채 썰어서 곁들이죠. 겨자가루를 따뜻한 물에 불렸다가 식초·설탕·소금을 넣고 만든 소스를 뿌려 먹으면 돼요. 뭐랄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 새해 우리나라에 딱 필요한 게 아닐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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