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소' 개념까지 반영한 훈민정음… 5세기 前 이미 현대언어학에 도달

입력 2019.12.05 03:00 | 수정 2019.12.05 13:53

[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한글의 탄생' 쓴 日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

일본 도쿄의 대형 서점인 기노쿠니야 신주쿠(新宿) 본점. 외국어 학습서를 모아둔 7층 한 켠은 한국어 코너가 차지하고 있다. 일본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野間秀樹) 가 지난 10여 년간 엮은 ‘한국어 교육론 강좌’ 1~4권도 여기 꽂혀 있다. “제가 1970년대 공부할 땐 한국어 교재나 강의는 거의 없었죠. 요즘엔 혐한(嫌韓)이다 뭐다 해도 일본에는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최근 신주쿠에서 만난 그는 일본어 억양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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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가 그간 펴낸 한글 연구서를 들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그가 한국어를 공부할 때 사용했던 사전. 여백에도 빼곡히 예문을 적었다. /도쿄=최은경 특파원

2010년 일본에서 ‘한글의 탄생:문자라는 기적’을 출간한 언어학자다. 그는 “한글의 탄생은 세계 문자사(史)의 기적”이라고 했다. 이 책은 이듬해 한국에도 번역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일본에선 마이니치신문·아시아조사회의 아시아태평양상 대상을, 한국에선 주시경학술상을 받았다. 그는 “‘한글의 탄생’이란 책이 나오기 전 일본에서는 지식인들조차 한글이 막연히 가나(일본 글자)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청년 시절엔 미술학도였다.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도 1979년 ‘7인의 작가 한국과 일본’ 교류전 때문이었다. 서른이 되던 해엔 도쿄외국어대 조선어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한국 기독교방송 아나운서들이 녹음한 한국어 학습 테이프를 복사해두고,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으며 따라했죠.”

그는 훈민정음이 15세기에 이미 현대언어학의 수준에 도달한 과학적인 문자라고 설명했다. 현대 언어학에서 주목 받은 ‘음소(音素·의미를 구별하는 음의 최소 단위)’ 개념에 이미 도달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ㄱ(기역)과 ㅋ(키읔)은 지금 보면 너무 당연하고 타당한 모양이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시작 단계에서는 그렇지 않다”며 “기역과 키읔을 발음하는 기관의 형태는 같지만 숨이 거세게 나오느냐 아니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문자 형태에 반영한 것은 20세기 언어학 수준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한글의 ‘인류사적 의미’도 강조했다. 그는 “세상 많은 문자 중 훈민정음만이 해례본을 통해 누구를 위해, 어떤 원칙에 따라 만들어졌는지 밝혔다”며 “훈민정음은 한 언어권의 지(知·앎)가 문자를 통해 어떻게 날개를 펴는지 보여주는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세종대왕을 “지의 혁명을 이룩한 인물”로 평가했다.

2014년엔 한일(韓日) 지식인 140명에게 한국의 지성을 보여주는 책을 추천받아 ‘한국의 지(知)를 읽다’란 책을 펴냈다. 지금은 후속서 ‘한국의 미(美)를 읽다’를 준비 중이다. 학생들에겐 현 시대 ‘언어의 위기’를 강조한다. “일본 정권과 미디어가 강조하는 ‘한일관계 악화’라는 잘못된 말 때문에 차분하게 양국 역사를 돌아보려거나, 한국의 무언가를 배우자는 생각은 설 자리를 잃고 있어요. 사실 한일 관계가 아니라 ‘한일 정권 관계’의 악화에 가까운데도요.” 이 같은 언어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취지로 펴낸 게 최신작 ‘언어존재론(도쿄대학출판회)’이다. 언어학 일반에 대한 이 책에서도 말과 글의 존재 원리를 보여주는 주요 문자로 한글을 설명한다. “사실과 다른 말이 많은 때일수록 무방비하게 있어선 안 됩니다. 바로 지금 일상에서 반복되는 ‘말’이 정말 타당한지 의심하고 언어에 대해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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