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디지털의 아버지'… 한글은 IT 시대에 더 큰 잠재력

조선일보
입력 2019.12.05 03:00

[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날개를 편 한글' 낸 獨 한국학자 알브레히트 후베

"이분 덕에 제가 지금 여기 있는 거죠."

독일인 한국학 연구자인 알브레히트 후베(69) 덕성여대 초빙 교수가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후베 교수는 반세기 가까이 한글의 매력에 빠져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으로도 불린다. 최근 연구서 '날개를 편 한글'(박이정)을 펴낸 그는 "570여 년 전에 나온 한글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철학과 과학성을 모두 갖추고 있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문자"라며 "IT의 연결을 통해 한국인은 디지털 시대에 다양한 학술 영역에서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독일인 알브레히트 후베 교수가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자신의 책을 펼쳐 들었다.
독일인 알브레히트 후베 교수가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자신의 책을 펼쳐 들었다. 그는 "세종대왕은 의심 없이 디지털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그는 지난해 한국인과 외국인들이 퀴즈 대결을 펼치는 방송 프로그램 '대한외국인'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배 속이 허전해서 계속 먹고 싶다'라는 단어인 '구쁘다'의 뜻을 맞혀서 한국인 출연자들을 꺾고 최종 승리했다. 후베 교수는 "논문에서 우연히 '구쁘다'란 단어를 발견했는데 낯설지만 인상적이어서 기억이 난 것"이라며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잘할 리는 없지 않겠어요?"라며 웃었다.

후베 교수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위생병으로 한국 대표팀을 담당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970년대 독일에 파견됐던 한국인 간호사와 광부들 집에 초대받기도 했다. 독일로 유학 온 김광규 시인도 만났다. 허배(許培)라는 한국 이름도 김 시인이 지어줬다.

독일 보훔대에서 신소설 '혈의 누'와 문학 동인지 '백조'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을 번역했다. 1989년부터는 본 대학교 한국어 번역학과 교수를 지냈다. 26년간 길러낸 제자만 250여 명. 한국인 제자가 선물한 200봉지의 믹스 커피(설탕, 프림이 들어간 한국식 커피) 덕분에 지금도 하루에 믹스 커피를 대여섯 잔씩 즐긴다. 그는 "믹스 커피 두 봉지를 작은 잔에 털어 넣은 뒤 뜨거운 물을 조금만 부어서 진하게 마시는 게 좋다"고 했다.

1980년대부터 방한할 때마다 청계천 세운상가를 뒤지면서 컴퓨터 한글 프로그램을 연구했다. 호환성이나 메모리 제약 등으로 한글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컴퓨터 본체를 뜯어서 들고 오기도 했다. 이찬진 한글과컴퓨터 설립자를 비롯한 '아래아한글' 개발팀도 세운상가에서 만나 고민을 나눴다. 시정곤 KAIST 교수는 후베 교수에 대해 "한국에 컴퓨터가 막 보급되던 시절부터 한글 코드를 만들기 위해 공학도와 협업을 진행한 '한글 공학'의 선구자"라고 평했다.

후베 교수는 'IT와 훈민정음'이란 연구 주제도 이때부터 고민했다. 2010년 독일어판으로 연구서 '한글과 컴퓨터: 한국 문자의 비밀을 찾아서'를 먼저 펴냈고, 9년 만에 한국어판('날개를 편 한글')을 펴냈다. 이 연구서에서 그는 기존의 두벌식 세벌식과는 다른 독창적인 한글 자판을 개발해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첨단 IT 시대에 엄청난 잠재력이 더욱 빛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글은 내게 '묶여 있는 영웅'과도 같다"면서 "세종대왕은 의심할 여지 없이 디지털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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