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참고, 교만하지 않아야 '神의 물방울' 되죠

조선일보
입력 2019.12.04 03:01

[세계서 가장 유명한 와인家 바롱 필립 드 로칠드]

만화에 나온 '샤토 무통 로칠드' 등 "죽기 전 꼭 마셔야 할" 와인 생산
피카소·샤갈·달리… 이우환까지 업계 최초 상표에 명화 붙여 판매
"이 한병에 과학·예술이 담겨있죠"

"와인은 불공평해요. 반짝이는 신인이 나올 순 있어도 계속 잘되긴 어렵거든요. 1~2년 동안 1500병쯤만 만든다면 해볼 만하겠지만, 100년 넘게 수백만 병씩 매년 만들려면 그 이상의 뭔가가 들어요. 변덕스러운 날씨와 자연재해, 지구온난화까지 대응할 수 있어야 하죠. 우린 이런 모든 위기에 가장 오래 시달렸고, 그 덕에 가장 단련된 회사일 거예요(웃음)." 힘든 순간을 묻자 필립 세레이 드 로칠드(56)는 자줏빛 와인처럼 농익은 여유가 넘치는 답을 했다.

프랑스에서도 가장 유명한 와인가(家)로 꼽히는 '바롱 필립 드 로칠드'의 대표다. 보르도에서 생산되는 와인 중 특 1등급 와인 5개 중 2개인 '샤토 라피트 로칠드'와 '샤토 무통 로칠드'가 이 회사에서 만드는 것. 특히 샤토 무통 로칠드는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밀레의 '만종'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맛을 표현했던 와인이자, 와인 애호가들이 "죽기 전 꼭 마셔봐야 한다"고 말하는 와인으로 꼽힌다. 요즘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다는 와인 '무통 카데', 미국 로버트 몬더비와 손잡고 만든 '오퍼스 원', 칠레에서 생산하는 '알마비바' '에스쿠도 로호'도 모두 이 회사 제품이다.

필립 세레이 드 로칠드 회장이 그의 회사가 만든 와인 사이에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와인은 사랑과 비슷하다. 오래 참고, 시기하거나 교만하지 않은 맘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필립 세레이 드 로칠드 회장이 그의 회사가 만든 와인 사이에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와인은 사랑과 비슷하다. 오래 참고, 시기하거나 교만하지 않은 맘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장련성 기자

지난달 말 서울에서 만난 로칠드는 "우리는 가장 싼 제품도 가장 비싼 제품도 그 등급 안에서 최고를 만들려고 100년을 발버둥쳐왔다"고 했다. "흔히들 와인은 해마다 작황과 날씨에 따라 맛이 다르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상품이잖아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품질이 웬만큼은 같아야 해요. 그 예측 가능함과 안전함을 지킬 수 없다면 최고가 될 수 없죠. 변덕과 한결같음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찾는 겁니다."

이 무서운 균형 감각은 이 회사의 DNA에 새겨진 것일지도 모른다. 바롱 필립 드 로칠드는 본래 영국과 유럽을 장악했던 유대인 집안이자 금융 재벌 가문에서 출발했다. 항상 1등만 했을 것 같지만, '2등' 꼬리표를 떼기 위해 오래 안간힘을 썼다. 1853년 너새니얼 남작이 프랑스 보르도에 성(城)이 있는 포도밭을 하나 사들였고 여기서 만든 와인을 '샤토 무통 로칠드'로 이름 붙였지만 1855년 2등급을 받았다. 증손자 필립 남작이 도약을 꿈꿨다. 이전까지 양조장에선 와인은 만들기만 하고 중간 거래상이 병에 담고 상표를 붙여 시장에 내놨지만, 필립 남작은 업계 최초로 자신이 직접 만든 포도주를 병에 담고 상표를 붙여 파는 일까지 했다. 현재 대다수 와인 회사가 그가 고안한 방식을 따른다. 1973년엔 샤토 무통 로칠드로 결국 1등급을 받았다. 1등급으로 올라서는 데 118년이 걸린 것이다. 로칠드는 "토끼와 거북이 같은 얘기 아니냐"고 했다. "우리는 끝내 이기는 법을 체득했어요. 멀리 보고 눈앞의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거죠."

필립 남작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딸인 필리핀 드 로칠드가 샤토를 물려받았다. 필립 세레이 드 로칠드의 어머니다. 필리핀 드 로칠드는 와인병에 예술을 입혔다. 아버지와 함께 병에 붙이는 상표(레이블)를 피카소·샤갈·달리 등 같은 화가들에게 맡긴 것. 당시로선 파격적인 작업이었다. 우리나라 작가 이우환과도 협업했다. 로칠드는 "내 아버지는 배우였고, 어머니는 와인 가문의 여장부였지만 예술을 사랑했다. 우리는 와인을 과학이자 예술로 이해한다"고 했다. "와인 농사를 위해 매년 온갖 실험을 하고 모든 수치를 받아 적어가면서 일하지만 결과물은 오감을 동원해서 맛보죠. 과학과 예술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 와인을 빚는 겁니다."

한국 남자 상당수는 와인을 여전히 소주보단 어려운 술로 여긴다. 로칠드는 "그냥 심호흡하듯 들이켜면 된다"고 했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안주도 없이 와인 한 모금을 탁 마실 때가 저도 자주 있어요. 그때마다 '아, 내가 이 한 모금 마시려고 오늘도 열심히 살았구나!' 생각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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