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여배우의 치매

조선일보
입력 2019.11.11 03:15

치매라는 병이 확인된 것은 1906년이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건 70여년이 지난 뒤 한 여배우가 치매 진단을 받으면서다. 1940년대 할리우드 섹스 심벌이었던 리타 헤이워스는 62세이던 1980년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고 69세에 숨졌다. 그의 딸은 "엄마의 병이 알코올 중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치매 진단을 받고 나서야 지옥 같던 시간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의학계에서는 헤이워스 덕분에 치매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사람들이 알게 됐다고 말한다. 미국 알츠하이머협회는 1985년부터 매년 '리타 헤이워스를 추모하는 치매 기부모임'을 열고 있다.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는 배우 문소리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젊고 예쁜 후배들에 치여 1년에 영화 한 편 찍을까 말까 하면서도 아무 작품이나 덥석 할 수 없는 중견 여배우의 삶을 그렸다. 이 영화는 "예쁜 것보다 매력 있는 게 더 중요해"라는 대사에 하고픈 말을 압축했다. 그런 매력을 갖춰야만 모든 여배우의 꿈인 '자연스레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여배우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활동하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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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윤정희가 5년째 치매를 앓고 있으며 최근 들어 심각해졌다고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밝혔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분간 못 하고 왜 거기 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딸에게는 "나를 왜 엄마라고 부르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딸은 "요즘도 엄마는 '오늘 촬영은 몇 시냐'고 묻는다"고 했다. 스물두 살에 데뷔해 영화 330여 편을 찍으며 사랑받았던 여배우의 안타까운 근황이다.

▶윤정희는 과거 인터뷰에서 "그레타 가르보처럼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다가 스톱하지 않을 것"이라며 "오드리 헵번같이, 잉그리드 버그먼같이 세월 흐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었다. "삶이라는 게 젊을 때도 아름답지만 나이 들어도 근사한 것 아니에요? 추하지 않고 의연하고 건강하게 늙고 싶어요"라고도 했다.

▶윤정희의 마지막 작품은 2010년 개봉한 영화 '시'다.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살면서 치매를 앓는 66세 여성 역할이었다. 그때 실제로 66세였던 윤정희는 치매가 현실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윤정희는 영화 개봉 당시 "여배우로서 나이 먹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관객들이 그럴 수 있는 용기를 준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사랑했던 여배우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무대에서 내려가고 있다. 그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관객들이 용기를 불어넣어 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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