睡魔… 세상의 절반을 놓치고 있다

조선일보
  • 한은형 소설가
입력 2019.11.09 03:00

[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애정만세]

밤은 잠을 자며 내일을 위해 충분히 휴식하는 시간이다.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지겨울 만큼 길고 깊은 시간이다.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든 잠들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사연은 다를지라도 불면(不眠)은 괴로운 일이다. 깨끗하고 환한 카페에 앉아, 모든 사람이 떠나는 밤까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마음은 어떨까. /게티이미지뱅크
밤은 잠을 자며 내일을 위해 충분히 휴식하는 시간이다.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지겨울 만큼 길고 깊은 시간이다.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든 잠들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사연은 다를지라도 불면(不眠)은 괴로운 일이다. 깨끗하고 환한 카페에 앉아, 모든 사람이 떠나는 밤까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마음은 어떨까. /게티이미지뱅크
잠을 이루지 못했던 적이 없다. 하루에 커피를 두 잔 이상 마셨을 때를 빼고는. 또 나는 책을 한 시간쯤 보다가 잠을 자고 싶은 사람인데, 그랬던 적도 거의 없다. 이십 분도 안 되어 '수마'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내 눈꺼풀을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대 옆 탁자에 쌓아둔 침대용 책은 거의 그대로다.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과 어울려 놀다가도 밤이 늦어지면 졸음이 쏟아진다. 밤의 즐거움이랄지 밤의 신비랄지를 체험할 새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절반을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내게는 내일을 위해 충분히 자야 하는 시간에 불과한 밤을 다른 사람들은 농밀히 보내고 있다고 느낄 때 그렇다.

"그렇지만 밤에 사람들은 여전히 환락을 즐기거나, 명상을 하거나, 고된 노동을 하기도 했다. 무덤을 파는 사람들, 야경꾼, 청소부들은 밤에 일했다. 유리 공장이나 빵 가게나 방앗간에서도 밤에 일했다. 또한 아낙네들은 이웃을 방문하여 뜨개질이나 물레질 같은 두레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들은 바로 이런 장소에서 재치 있는 이야기꾼들의 재담에 즐거워하기도 했다. 밤은 가난한 사람들, 노예, 동성애자, 종교적 소수자에게 도피처가 되어, 적어도 그 시간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다고 느꼈다. 에덴동산의 순수함을 다시 포착하려던 '아담파(派)'는 밤에 모여 나체로 예배를 보았다. 미국의 흑인 노예들은 밤에 인접 농장에 있는 배우자를 만나거나 춤판을 벌이기도 했다."

중세 시절 귀족이 아닌 사람들이 밤을 보내는 방식이란다. 귀족은 주로 유흥을 위해 밤을 썼다. 불꽃놀이를 즐겼고, 화려한 조명을 사용한 야외 공연을 보았고, 쾌락을 추구하며 난장판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로저 에커치의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를 옮긴 조한욱이 쓴 서문에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밤은 어떤가. 귀족들이 하던 걸 대중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무슨 날이면 불꽃놀이가 빠지지 않으며, 야외무대는 아니지만 다양한 공연들을 볼 수 있고, 얼마나 쾌락에 닿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음만 먹으면 365일 다른 종류의 술집을 갈 수도 있다. 로저 에커치는 현대의 밤이 인공조명 덕분이라고 말한다. 밤에도 일하고, 밤에도 공연을 보고, 밤에도 에스파냐나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는 밤 10시가 되어야 저녁 식사를 시작하는 일들 같은 게.

잠시 베를린에 살았을 때 내 옆집 사람들이 그랬다. 내가 살던 집은 마당이 딸린 작은 이층집이었는데, 마당에 나가거나 2층에 올라가서 보면 그들이 파티를 하는 게 보였다. 파티는 늘 밤 10시에 시작되었다. 열 명이 못 되는 사람들이 마당에 내놓은 식탁에 앉아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촛불 모양으로 만들어진 인공조명이 빛나는 게 내 집에서도 보였다. 파티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세 시간 동안 이어지고, 사교적 웃음이 끊이지 않던 그 자리를 파티가 아니면 뭐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를 읽다가 그들을 떠올렸다. 밤 10시에 마당에서 파티를 할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인공조명 덕분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또 한 편의 짧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밤의 카페가 배경이다. 아주 밝고 환한 곳이다. 손님이 한 명 있다. 팔십에 가깝거나 팔십을 넘었을지도 모르는 남자 노인. 노인은 브랜디를 최소한 두 잔 마셨다. 세 잔째 마시려고 하는데 주문을 받는 웨이터가 단호하다. 이제 카페는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인은 한 번 더 요청해보나 웨이터가 한 번 더 거절하자 순순히 일어선다. 술값에 팁을 더한 돈을 내고서. 단호한 웨이터 말고 한 명의 웨이터가 더 있다. 둘 중에 연장자다. 이 사람은 단호한 웨이터와 달리 노인이 카페에 더 있어도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카페의 폐점 시간은 한 시간이 더 남아 있다. 연장자 웨이터는 노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더 있다. 노인이 지난주에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 밧줄에 목을 매달았는데 조카가 밧줄을 자른 덕에 죽지 못했다는 것. 이 이야기를 단호한 웨이터에게 하자 그는 묻는다. 왜 자살하고 싶었을지.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이다. 원제로는 'A clean, well-lighted place'. 나는 소설의 제목이나 영화 제목 같은 건 잘 기억하는 편인데 이 짧은 소설은 예외다. '환하고 깨끗한 카페'라고 할 때도 있고 '깨끗하고 환한 곳'이라고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깨끗함'과 '환함'이 제목에 들어간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 소설의 분위기를 만든 건 바로 이 깨끗함과 환함이기 때문이다.

"늦은 시간이라 모두 카페를 떠나고, 나뭇잎들이 전등 빛을 받아 그림자를 드리운 곳에 앉은 노인만 남았다. 낮에는 거리에 먼지가 일었지만, 밤이 되면서 이슬이 먼지를 가라앉혔다. 노인은 밤늦게까지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지금처럼 밤이 되면 조용해졌고, 노인은 귀머거리였음에도 낮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카페 안의 두 웨이터는 노인이 약간 취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좋은 손님이었지만 너무 취하면 돈을 내지 않고 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계속 지켜보고 있다."(헤밍웨이 저, '킬리만자로의 눈', 정영목 역, 문학동네)

이 소설의 시작 부분이다. 나는 헤밍웨이나 이 소설을 그리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데, 이 부분은 좋아한다. 그래서 계속해서 읽게 된다. 모두 떠난 시각에 혼자 카페에 남은 노인의 뒷모습을 상상하고, 먼지를 가라앉힌 이슬이 있는 밤공기를 떠올리고, 두 웨이터가 보지 않는 척하면서 노인을 보는 시선을 그려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귀머거리인 노인이 느끼는 밤의 감각은 어떤 것일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노인은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사람인지도 궁금하고, 들린다면 어떤 소리만이 들리는지도 궁금하다. 또 온전하지 않은 청각 대신 어떤 감각이 발달했을지 궁금하다. 아니면, 이 카페에 오면 노인의 다른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노인이 이 카페에서 떠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카페는 깨끗하고도 환한 곳이니까. 연장자 웨이터는 단호한 웨이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카페에 밤늦게까지 앉아 있고 싶어하는 쪽이야"라고. "잠들고 싶지 않은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이고, 밤에 불을 켜두어야 하는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 잠들 수밖에 없는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인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잠들고 싶지 않은 그 모든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의 다른 절반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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