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TX, 우리 땅 밑엔 안돼"… 地下權 들고일어난 주민들

조선일보
입력 2019.10.29 03:00

[서울 청담·후암동, 파주 교하 노선 지나가는 곳곳서 반발]
"한강 옆 청담동 지반 꺼질수도… 낡은집 많은 후암동 진동 취약"
전문가들 "지하 더 깊이 운행하는 등 주민 피해 최소화해야"
일본은 갈등 줄이려 '도심 지하 공공사업땐 보상 없다' 규정

"주민 몰래 결정한 지하 노선을 즉각 변경하라!"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도로변에서 청담동 주택가 지하로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A 노선이 통과하는 걸 반대하는 주민들이 '주택붕괴' '열차탈선' 등이 쓰인 깃발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도로변에서 청담동 주택가 지하로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A 노선이 통과하는 걸 반대하는 주민들이 '주택붕괴' '열차탈선' 등이 쓰인 깃발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지난 1월부터 세종시 정부청사와 청담동 인근 등에서 100차례 가까이 GTX-A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지호 기자
지난 22일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富村)으로 꼽히는 강남구 청담동 도로변에서 GTX(수도권광역급행철도)-A노선 통과를 반대하는 주민 집회가 열렸다. 주민 60여명이 '청담동이 무너진다'고 쓰인 빨간색·노란색 깃발을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확성기 소리와 요란한 꽹과리와 북소리가 겹치면서 강성 노조의 집회를 떠올리게 했다. 이들은 지난 1월부터 9개월째 세종시 정부청사 국토교통부 앞과 청담동 인근 등에서 100차례 가까이 GTX-A노선 통과 반대 시위를 벌였다. 지역 주민 380여 가구 1500명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거리로 나섰다. GTX는 지하 40m 깊이에서 운행하지만, 노선이 지나가는 지역의 주민들은 곳곳에서 "내 집 밑으로는 지나가면 안 된다"고 반발하고 있다. 주민들은 지상만이 아니라 땅속 지하에 대한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도로 포화, 부지 부족 등으로 교통망 확충이 어려운 상황이라 철로·도로 지하화가 늘어날 수밖에 없어 이런 사회적 갈등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GTX 지하 노선이 안전과 재산권 위협"

GTX 건설 반대하는 주민들
GTX-A는 경기 파주 운정에서 일산, 서울역, 삼성역 등 서울 도심을 지나 경기 동탄까지 연결하는 광역급행전철이다. 수도권 교통난 대책으로 2023년까지 완공을 목표로 작년 말 착공했다. GTX-A뿐 아니라 앞으로 착공이 예정된 B·C노선도 주민 반발이 불거진 상태다. GTX 노선은 서울역, 청량리역, 삼성역을 중심으로 서울 도심을 완전히 관통하도록 설계돼 있기 때문에 GTX가 지하로 지나가는 지역마다 주민 반발이 생길 수 있다.

청담동 주민들은 GTX 노선이 안전과 재산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한강 인근이라 지반 침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재산권도 크게 침해된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지하 시설물이 들어가는 지하 공간에 '구분 지상권'을 설정해 일부 보상하고 있지만, 청담동의 경우 가구당 40만원이 채 안 되는 수준의 보상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청담동 주민들은 부동산 가격이 적어도 현재 시세 30% 정도, 가구당 7억~8억원 정도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민 최모(68)씨는 "한강으로 지나가는 대안 노선을 만들 수도 있는데, 반대를 무릅쓰고 기존 계획을 고수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 주민 1000여명도 안전 문제가 생긴다며 GTX-A노선 건설을 반대한다. 용산구 비대위원장 박문희씨는 "후암동 일대 주택은 대부분 지은 지 80년을 넘겨 진동에 취약하다"며 "지하에 GTX가 지나다니면 밤마다 집이 무너질까 봐 불안에 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 파주 교하지구 일대 주민들은 "열병합 발전소 밑으로 GTX가 지나가는 만큼 대형 안전사고가 우려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GTX-B 예정 노선으로 알려진 서울 여의도 지역 아파트 단지들도 주민 모임이 열리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하 교통 시설에 대한 사회적 합의 필요

공공 교통 시설이 지하를 지나면서 사회적 갈등이 커진 대표적 사례가 수서발 고속철(SRT) 율현터널이다. 수서~동탄 구간에서 2016년 개통한 50㎞ 길이 지하 터널인 율현터널은 경기 용인시 공세동 한 아파트 단지 아래를 통과했다. 당시에도 정부는 지하 공간에 대한 '구분지상권'을 설정해 공사를 진행했는데, 주민들은 공사 기간 내내 소음과 진동으로 고통받고, 주택값은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고 한다. 아파트 주민들은 "정부가 아무 문제 없다고 해서 넘어갔는데, 피해를 주민들이 고스란히 떠안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공공 교통사업을 벌일 때마다 드는 사회적 갈등 비용이 정부가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커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공항이나 철로 주변 피해에 대한 기존 보상책은 주민들을 납득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일일이 누적되면 막대한 예산 부담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앞으로는 지하 공간에 대한 보상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일본의 경우는 사회적 갈등을 줄이기 위해 도심 지하에 공공사업을 진행하는 경우엔 아예 보상이나 동의 없이 시행하도록 특별법을 만들었다. 반면 미국에선 건물 상공의 '공중권'을 보장해 사고파는 것까지 허용한다. 건국대 부동산학과 심교언 교수는 "기술적으로 지하 심도를 더 낮추거나 해당 구간을 지날 때는 속력을 낮춰 운행하는 식으로 주민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정부가 구분지상권 범위와 보상 수준을 미리 가다듬어서 사회 갈등을 예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하권

다른 사람이 소유한 토지 지하에 시설물이나 건물을 설치해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법적으로는 구분지상권이라고 부른다. 토지 전체 사용을 인정하는 지상권과 달리 지하나 지상 일정 구간에 대한 권리라는 뜻이다. 송전선 설치 등의 경우 토지나 건물의 상공에 대해서도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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