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정치편향 교육에 맞선 인헌고 3학년들, "생기부 작성 끝나 용기냈다"

입력 2019.10.22 17:22 | 수정 2019.10.22 22:34

‘정치편향 교육’에 반발한 인헌고 학생들, 단체 행동 나서
22일 서울시교육청 청원 이어, 23일 방과 후 기자회견
3학년生 "침묵할 수밖에 없는 후배들 위해 나선다"
"선생님 보복 두려워 주저…용기낸 친구들 자랑스럽다"
‘학생수호연합’ 페이스북 계정엔 피해 익명 글들 올라와

"부끄럽지만 대입(大入)에 필요한 학생생활기록부(생기부) 작성이 끝나 용기를 냈습니다. 학교 측의 ‘반일(反日) 구호’ 강요는 학생들을 정권의 입맛에 맞게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일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반일 구호’를 외치도록 강요해 논란이 된 서울 관악구 봉천동 인헌고 학생들이 "학생들의 가치관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라"며 단체 행동에 나섰다. 이 학교에서는 "반일 구호에 동의하지 않는 학생은 ‘일베회원’ ‘수구’ 등으로 매도했다" "조국 전 법무장관 관련 뉴스는 모두 ‘가짜 뉴스’라고 했다"는 학생들의 주장도 나와 논란을 빚었다.

인헌고 학생들이 만든 ‘인헌고 학생수호연합(학생수호연합)’ 측은 22일 "정치적 편향을 강요하는 일부 교직원의 행태에 대해 심각성을 인식하고 조속히 감사에 착수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을 서울시교육청에 제출했다. 오는 23일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특정 정치색을 강요받아온 학생들의 실제 피해사례를 고발할 계획이다.

‘인헌고 학생수호연합’의 주축은 수능을 목전에 둔 이 학교 3학년 학생들이다. 그동안 일부 교사들의 정치 편향적 교육에도 제대로 된 항의 목소리를 못 내던 3학년생들이 단체 행동에 나선 계기는 "대입에 영향을 미치는 생활기록부(생기부) 작성이 끝나 이젠 선생님들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정치 편향 교사 행태는 학생 인권 짓밟는 폭거"…서울 교육청에 감사 청원
학생수호연합 측에 따르면, 인헌고 재학생 150여 명은 22일 오전 변호인의 도움을 받아 서울시교육청에 청원서를 접수했다.

22일 오전 ‘인헌고등학교 학생수호연합’ 측 변호인이 서울시교육청에 접수한 청원서. /채민석 기자
22일 오전 ‘인헌고등학교 학생수호연합’ 측 변호인이 서울시교육청에 접수한 청원서. /채민석 기자
이들은 청원서에서 "인헌고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 편향적이며 특정 정파적 입장을 두둔하고 학생들의 가치관·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교직원의 행태는 학생의 인권을 짓밟는 폭거와 다름없다"며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조속히 감사에 착수하고, 학교 측의 해당 학생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가 발생되지 않도록 지도·감독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22일 오후 서울 관악구 인헌고에서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과 만난 최인호군. 최군은 “평소 교실에서의 정치 편향성 주입 문제가 있다고 느껴왔다”며 “선생님들의 평가가 들어가는 생기부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1~2학년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박소정 기자
22일 오후 서울 관악구 인헌고에서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과 만난 최인호군. 최군은 “평소 교실에서의 정치 편향성 주입 문제가 있다고 느껴왔다”며 “선생님들의 평가가 들어가는 생기부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1~2학년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박소정 기자
인헌고 재학생들은 오는 23일 오후 4시 30분 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학생들의 사상과 자유를 보장하라’고 주장할 예정이다. 학생수호연합 대변인을 맡고 있는 3학년 최인호(18)군은 "지금까지 선생님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해온 학생들의 피해 사례들을 고발하고, 우리 학생들이 개혁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최군은 이날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과 만나 "평소에도 교실에서 정치 편향성 주입 문제가 있다고 느껴와 1·2학년을 포함해 함께하고 싶은 친구들을 모았다"고 말했다. 최군은 3학년을 중심으로 공개적인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고 했다. 3학년은 지난 8월 31일 부로 대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학생생활기록부(생기부) 작성이 끝났기 때문에 더이상 선생님들의 눈치를 안 보고 부담 없이 나설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군은 "선생님들의 평가와 시선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1~2학년 후배들에게 앞으로 더 이상의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나서서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생기부 오점 남길까봐 침묵"…"文대통령 싫다고 했더니 극우냐" 핀잔
인헌고 일부 교사가 학생들에게 편향된 정치관을 주입하려 한다는 논란이 처음 인 것은 지난 17일이다. ‘인헌고 달리기 걷기 어울림 한마당’이란 행사에서 일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반일 구호를 외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당시 현장 영상에 따르면, 교사들은 일부 학생을 무대 위로 불러낸 뒤 "배(倍)로 갚자, 배로 갚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아베 자민당 망한다" "아이러브 코리아" 같은 구호를 외치게 했다. 한 교사는 "구호를 외칠 때 뒷부분을 크게 두 번씩 반복하라"며 ‘일본 경제침략 반대한다 반대한다’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축하한다 축하한다’ 같은 구호를 선창(先唱)하기도 했다.

지난 17일 서울 인헌고의 ‘달리기 걷기 어울림 한마당’ 행사에서 단상에 오른 학생들이 ‘일본은 사죄하라’는 구호를 적은 종이와 태극기를 펼쳐보이고 있다. 학생들에 따르면, 일부 교사는 행사 1주일 전부터 학생들에게 이 같은 그림을 만들도록 했다고 한다. /인헌고 학생수호연합 제공
지난 17일 서울 인헌고의 ‘달리기 걷기 어울림 한마당’ 행사에서 단상에 오른 학생들이 ‘일본은 사죄하라’는 구호를 적은 종이와 태극기를 펼쳐보이고 있다. 학생들에 따르면, 일부 교사는 행사 1주일 전부터 학생들에게 이 같은 그림을 만들도록 했다고 한다. /인헌고 학생수호연합 제공
인헌고 1~3학년 재학생 20여 명은 이튿날인 18일 ‘인헌고등학교 학생수호연합’이라는 페이스북 계정을 열고, "일부 교사의 편향된 정치 사상 주입 실태를 폭로하겠다"고 했다. 이후 피해 경험을 고발하는 익명의 글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한 학생은 해당 계정에 "아직도 선생님들이 무섭다. 개인적으로 선생님들을 마주쳐 친구들과 정치 관련 이야기들을 나누다 자신의 생각에 맞지않는 발언을 한 후배들은 ‘일베’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며 "늘 암묵적인 침묵만이 생활기록부에 오점을 남기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교육됐다"고 썼다. 이 학생은 "이번에 학생수호연합이 목소리 내는 것을 보고, 피해경험이 생각이 나서 함께하고 싶었지만, 선생님들의 보복이 두려워 주저하게 됐다"며 "이런 학생조직을 만들어준 친구들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익명에 의존하는 점이 친구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고 했다.

계정에는 "일부 교사가 ‘탈원전돼야 한다. 모두 원전마피아들에게 속고 있다’ ‘우리나라 우파진영은 멍청하다’는 발언을 했다"는 글도 올라왔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생은 본지 인터뷰에서 "(내가) 수업시간에 문재인 대통령이 싫다고 이야기했는데, 한 선생님이 ‘나는 좋아하는데, 왜 싫어하느냐. 혹시 극우냐’고 쏘아붙여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생은 "수행평가로 박정희 대통령의 위인전을 읽고 ‘경제 하나만큼은 잘한 대통령’이라는 소감문을 쓰고 있었는데, 이를 본 선생님이 친구들 앞에서 대뜸 ‘일베냐’라고 물어 망신을 줬다"고 했다.

앞서 ‘학생수호연합'은 "학생들은 정치노리개가 아닙니다"라는 성명문을 냈다. 학생들은 성명서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이 전부 보는 공적인 석상에서 매우 적나라하게 정치 선동을 하며 교육의 중립을 깨트리는 행동을 자행하게 했다"며 "반일파시즘 사건에 대해 부조리함을 느끼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고 편향된 발언을 하는 선생들의 만행을 고발하고자 조직을 만들었다"고 했다. 학생수호연합 계정의 가입자 수는 22일 현재 1800여 명까지 늘어났다.

본지는 인헌고에 이번 논란에 대한 입장을 들으려 수차례 연락을 취했지만, 인헌고 측은 "지금은 인터뷰를 할 수 없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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