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선의 워싱턴 Live] 美철군 이틀만에 쿠르드 비극… 혈맹도 버리는 '트럼프 리스크', 주한미군도 안심 못한다

입력 2019.10.11 03:02

트럼프, 우크라이나 스캔들 설명하다 불쑥 "김정은과 통화한다"
김정은과 악수하고 사진찍고… 트럼프가 북 핵개발 부추긴 셈
스티븐스 前대사 "최근 워싱턴서 주한미군 철수 논의 늘고 있어"

강인선 워싱턴지국장

"트럼프 대통령이 느닷없이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를 결정하고 나서 '이런 끝없는 전쟁은 그만둬야 한다'고 한 것과 똑같은 일을 한국에 대해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워싱턴의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존 햄리 소장은 지난 7일 인터뷰에서 "만일 미국이 주한 미군을 철수하게 된다면 트럼프가 시리아에서 했듯 일방적으로 철수를 결정해버리는 것이 유일한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햄리 소장은 "트럼프가 김정은을 만나고 나서 '내가 한반도에서 평화를 이뤘다'며, '이제 한반도에 핵 전쟁은 없을 테니 주한 미군은 필요 없다'고 할 수도 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7일 시리아 주둔 미군을 철수시킴으로써 혈맹이었던 시리아 내 쿠르드족을 헌신짝처럼 버린 지 이틀 만에 미국의 또 다른 동맹국 터키가 쿠르드족 공격에 나섰다. 쿠르드족은 지난 5년간 이 지역에서 미국과 함께 극단주의 무장 세력 이슬람국가(IS)와 맞서 싸웠다. 3만50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하지만 트럼프는 "쿠르드족이 엄청난 양의 돈과 장비를 (미국으로부터) 지급받았다" "우리는 이익이 되는 곳에서만 싸울 것"이라며 미군이 떠나면 터키가 곧 시리아 내 쿠르드족을 공격한다는 것을 알고도 철군 결정을 내렸다. 이것이 '트럼프가 혈맹을 대하는 법'이다.

트럼프의 시리아 철군 결정엔 글로벌 리더로서의 책임도, 전략적 사고도, 지정학적 고려도, 동맹에 대한 의리도 없었다. 문제는 트럼프의 이런 충동적 결정이 쿠르드족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주한미군은 일찌감치 트럼프의 철군 희망 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만큼 한국이 언제 쿠르드족 신세가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과 우방들은 이제 외교정책에서 '트럼프 리스크'를 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 대사는 "주한 미군 철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종의 터부였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이제는 논의의 장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급작스러운 시리아 철군으로 동맹국들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워싱턴포스트는 8일 사설에서 "전 세계 미국의 동맹국들은 군사적인 파트너를 이렇게 쉽게 버리는 트럼프 정부와 협력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같은 날 월스트리트저널 사설은 "시리아 철군은 동맹국들에 백악관을 믿어선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어떤 동맹이 미국을 충직한 동반자로 볼 것이며, 어떤 적이 미국을 단호한 상대라고 두려워하겠느냐"고 했다.

이 같은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나 '신고립주의'의 실체는 오로지 미국의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미국 가까이 있는 위협에만 대응해 싸우며, 잘사는 나라의 호구 노릇은 하지 않겠다는 결의다. 그는 "미국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경찰 노릇을" 하지는 않겠다고 했고, 미국이 떠난 자리는 "엄청나게 잘사는 역내 다른 나라들이 보호할 때"라고 했다. 이런 인식에 따라 한국은 잘사는 나라라고 규정하며 터무니없이 많은 방위비 분담을 요구하고,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을 쏘아도 미국 근처가 아니므로 무시해버리는 것도 같은 논리다.

트럼프 대통령
트럼프의 충동적인 시리아 철군 결정 같은 일이 한국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실제로 최근 워싱턴에선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눈에 띄게 늘고 있었다. 이른바 '트럼프 효과'이다.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 재단 선임연구원은 "미·북이 어떤 합의를 이루게 되거나, 한·미가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할 때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주한미대사도 "방위비 분담 협상에서 트럼프가 기대한 만큼의 액수를 확보하지 못하면 어떤 경고로서 주한미군 규모를 줄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교착 상태에 빠진 미·북 비핵화 협상이나 한·미 방위비 분담 협상이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질 가능성은 현재로선 그리 높지 않다. 그보다 더 심각하고 현실적인 가능성은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에서 보았듯 트럼프가 즉흥적인 결정을 내리는 '트럼프 리스크'가 작용하는 경우이다.

트럼프는 취임 초부터 미국이 엄청난 자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에서 손을 떼고 싶어했다. 밥 우드워드의 책 '공포'를 보면, 트럼프는 2년 전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이었던 맥매스터에게 "그냥 승리했다고 선언하고 전쟁을 끝내고 미군을 귀국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한미군 역시 '평화가 왔다고 선언하고 그냥 철군하라는 결정을 내리는' 운명을 맞을 수도 있다.

주한미군뿐 아니라 한국의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트럼프의 대북 정책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수전 라이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8일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김정은과 사진을 찍고 악수를 함으로써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지속하고 미사일 시험을 계속해도 미국이 대응하지 않을 것이란 결론을 내리게 한 사람이 트럼프"라고 했다. 트럼프가 북한의 핵개발을 방관하고 부추긴 셈이 됐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9일 기자들에게 우크라이나 스캔들 관련 설명을 하다가 불쑥 김정은을 통화 상대로 거론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친서 외에 전화를 통해 소통해왔음을 시사하는 발언이다. 트럼프는 이전에도 여러 번 이 같은 발언을 했지만 실제 통화를 했는지 여부를 공식 확인한 사례는 없다.

우크라이나 의혹으로 탄핵 정국에 빠진 상황에서 트럼프의 대북 외교가 동력을 거의 잃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사지 애틀랜틱은 8일 "트럼프식 대북 외교가 그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고 전했다. 애틀랜틱은 탄핵에 사로잡힌 트럼프가 북한과 무엇을 해도 북한의 큰 양보가 있지 않은 한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탄핵은 결국 트럼프의 대북 외교에 종말을 고하는 조종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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