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후광 없다곤 말 못 해… 하지만 죽어라 일했습니다"

조선일보
입력 2016.10.25 03:00 | 수정 2016.10.25 17:35

[아트선재센터 관장 부임한 김선정]

김우중 前 대우그룹 회장 딸 '국내 미술계 영향력 1위' 뽑히기도
"대우 사태 후 힘들게 운영해와… 작가 위한 미술관 만들고 싶어"


"기업이 힘들면 미술관부터 문 닫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90년대 말 대우 사태가 났을 때 우리도 그래야 했었나 싶어요. 그만큼 어렵고 힘들었어요. 자금 없어 외부 전시 기획해서 예산 충당하고, 집에서 초청장 봉투 붙이고…."

큐레이터 김선정(51)씨가 예전 얘기를 꺼냈다. 김우중(80) 전 대우그룹 회장 딸인 그는 '재벌가 딸 스타일'에서 벗어나 현장을 뛰는 실무형 기획자로 명성을 쌓았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2005), 미디어시티 서울 비엔날레 총감독(2010), 광주 비엔날레 공동 감독(2012), 영국 미술 전문지 '아트리뷰' 선정 '2014 세계 미술계 파워 100인'에 오른 유일한 한국인…. 이력만 봐도 그의 미술계 파워를 알 수 있다. 올 초 아티스트 그룹 '뮌'이 국내 미술계 인사들의 관계도를 보여줬던 작품 '아트솔라리스'에서 영향력 1위로 꼽히기도 했다.

김선정씨가 아트선재센터 관장이 된 이후 처음 여는 전시‘스틸 액츠’전에 설치된 작가 이불의 작품‘장엄한 광채’앞에 섰다.
김선정씨가 아트선재센터 관장이 된 이후 처음 여는 전시‘스틸 액츠’전에 설치된 작가 이불의 작품‘장엄한 광채’앞에 섰다. 생선의 부패 과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1995년 김씨가 기획한‘싹’전에 전시된 작품이다. 이불은 아트선재의 첫 번째 개인전 작가이기도 하다. /조인원 기자
큐레이터로서 실력을 입증받은 그가 올 초 조용히 아트선재센터 관장직을 맡았다. 아트선재센터는 어머니 정희자(76)씨가 1998년 설립한 미술관이다. 김씨는 미술관 설립 때 학예실장 겸 부관장으로 일했다가 2004년 비영리 전시 기획 단체 '사무소'를 차려 독립했다. 12년간 독립 큐레이터로 개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아트선재와는 계약을 맺어 외부에서 지원하는 형식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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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미술관)밖에서 기획자로 일하다 보니 한국에도 규모는 작아도 '작가를 위한 미술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쿤스트할레식으로 기획 전시를 주로 하지 소장품을 기획해서 담론을 보여주는 노하우가 부족한 국내 미술관 풍토도 좀 바꿔보고 싶었고요." 최근 아트선재센터에서 만난 그는 "예전엔 전시 잘 만들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전기세, 물값까지 챙겨야 하니 힘들다. 뭣보다 관객이 적어서 걱정"이라며 웃었다.

김씨는 아트선재의 씨앗을 뿌렸다. 1990년대 중반 어머니 정씨는 미술관을 짓기 위해 서울 소격동에 있던 김우중 전 회장의 첫 직장인 한성실업 창업주 김용준 회장의 한옥을 사들였다. 한옥을 허물기 직전 1995년 김씨는 이곳에서 30대 젊은 한국 작가를 초청해 '싹'이라는 전시를 열었다. 그때 초대된 작가가 지금은 국내 화단의 대표 주자가 된 이불·최정화·안규철 등이다. 관장이 된 후 지난 8월 연 첫 전시 '스틸 액츠(Still Acts)'는 '싹' 전부터 시작한 아트선재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데 초점을 둬 이불, 정서영, 김소라 등 미술관을 거쳐간 작가 세 명을 초청했다. 1995년 '싹' 전에 참여했고, 1998년 개관 당시 첫 개인전 초청 작가였던 이불은 '스틸 액츠' 전 개막식에서 "'선재'는 20년 전 내 젊은 시절 고민이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라 시대가 앓는 열병이라는 걸 확인하게 해 준 고마운 존재이자, 늘 미술 현장의 중심에 있었다"며 남다른 애정을 표했다.

아트선재 개관 후 서도호·양혜규·함경아·임민욱 등 당시 유망주들이 김씨가 기획한 전시를 거쳐 스타가 됐다. 아트선재는 어려운 개념 미술을 주로 선보여 일반 관객들한텐 "전시가 어렵다"는 평을 받지만, 작가들에겐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관장이 되니 작가도 좋아하면서 관객도 만족하게 하는 전시를 하는 게 목표인데, 쉽지는 않네요. 관객들 눈높이 맞춰 작품 설명을 붙이자 하니 당장 작가들은 달가워하지 않고. (웃음)"

김씨는 "처음부터 '큐레이터'란 직함을 갖고 일했으니 아버지의 후광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면서도 "99년 대우 사태가 터진 뒤 미술관 재원(財源) 확보하러 사방팔방 다니고 아르바이트도 해서 정말 힘들게 운영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원래 미술관을 반대하셨어요. 그것보다는 없는 사람 돕는 복지 사업에 더 관심이 많으셨죠. 제가 미술이 좋아서 벌인 일이니 책임을 져야 했기에 죽어라 일했습니다." 2004년 부관장을 관뒀을 때 어머니와의 마찰설 등 소문이 많았다. 그는 "아버지가 도피 다니실 때라 미술관을 꾸려나가는 데 저도 힘들고 지쳐서 계속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초반엔 관장(이세득)과의 의견차도 있었다고 했다. "이 관장님은 점잖은 회화 중심의 미술관을 원하셨고 저는 안 알려진 젊은 한국 작가를 알리고 싶었기에 갈등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거쳐 미국 크랜브룩 미술대 서양화과 대학원을 졸업한 김씨가 큐레이터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백남준과의 만남이었다. 1990년대 초 남편(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일로 뉴욕에 머물던 김씨에게 김 전 회장 부부와 인연 있던 백남준이 휘트니미술관 인턴을 추천했다. 1년간 관장실부터 미술품 구매 담당 부서까지 두루 거치며 실무를 배웠다. 백남준이 다리가 돼, 1993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휘트니비엔날레-서울' 전시가 열렸을 때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처음 국내 전시에 참여하게 됐다. 그는 "백남준 선생님은 작가 한 명이 나라를 위해 얼마나 큰일을 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한 인물이었고, 저평가됐던 미국 미술을 뚝심 있게 소개해 세계 미술 중앙에 올린 휘트니미술관은 내게 한국 미술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해줬다"고 했다.

그가 벤치마킹하고 싶었던 '휘트니'가 이젠 한국을 알려고 온다. 최근에도 휘트니 관계자들이 한국 미술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서울에 왔단다. "한국 미술의 높아진 위상을 실감해요. 뿌듯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사실 마케팅만 잘했다면 더 일찍 알려질 수도 있었는데 아쉬워요." 우리 정부 주요 미술 프로젝트와 해외 기관 전시를 두루 참여해 온 그는 "해외와 비교하면 우리의 미술 예산이 절대 적은 게 아닌데 제대로 쓸 줄을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일례로 든 것이 일본 사례였다. "일본국제교류기금(재팬 파운데이션)에 20년 넘게 아시아 지역을 담당하는 직원 하나가 있다. 그 사람이 아시아 각국의 문화 현장이 어떻게 변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될성부른 떡잎도 지원한다. 나도 그런 식으로 초년병 시절 그와 인연이 닿았다. 아시아 기획자들 사이에서 '아시아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한 명의 직원이지만 그를 통해 일본 미술이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부나 공공기관의 문화 담당 직원이 2년이면 바뀐다. 담당이 현장을 모르는데 어떻게 제대로 돈을 쓰겠느냐"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정부가 주관하는 해외 전시에 대해선 "우리가 돈 싸들고 가서 일방으로 하는 전시는 의미가 없다"며 "대등한 관계에서 해야 상대도 열심히 해주지 우습게 보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고 했다.

철거 직전 한옥을 전시장으로 썼던 '싹' 전부터 시작해 시간이 스민 공간을 현대미술과 접합해 살리는 데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플랫폼 서울' 프로젝트에선 옛 서울역사와 옛 기무사를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했고, 2012년부터 매년 철원 근처 비무장 지대(DMZ)에서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도 해오고 있다. 장소적 특수성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된 프로젝트들로, 남다른 '촉(觸)'을 입증했다. 다음 목표는 "DMZ 안에 영구적인 미술관을 짓는 것과 일본처럼 지방 도시에 자기 개성을 지닌 좋은 미술관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부모님의 덕분에 어린 시절 다양한 문화에 노출된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꼬마 때 건축가 김수근 선생님이 계시던  '공간 사랑'에 가서 전시도 보고, 대학로에서 배우 추송웅이 나오는 연극도 봤어요.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때 오페라 '아이다'를 보고 국내에선 볼 수 없던 음향과 조명에 충격받았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지금 사운드 아트, 퍼포먼스에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렵게 동생 얘기를 꺼냈다. 아트선재는 불운의 사고로 죽은 그의 남동생 '선재'의 이름을 따서 지은 미술관이다. "글쎄, 젊은 사람 이름을 단 미술관이라 그런지 젊은 예술을 많이 보여준다는 분들도 있으시더라고요…." 담담하게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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