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른한 첫 사랑의 추억, 그리고 지고지순한 순애보. 2006년 겨울과 1969년의 여름이 만나 눈물 바다를 이뤘다. 무엇보다 그 바다에는 색깔이 없다. 투명한 광채만이 흐를 뿐이다.

제대로 된 멜로 영화가 나왔다. 이병헌-수애 주연의 '그 해 여름'(제작 KM컬쳐)이다. 겨울 초입에 웬 여름이야기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해 여름의 사랑은 이 해 겨울의 행복을 느끼게 할 만큼 찌든 영혼의 갈증을 풀어준다.

대학생 석영(이병헌)은 소위 있는 집 아들이다. 삼선개헌 반대 투쟁 등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겉돈다. 무료한 삶의 연속인 가운데 1969년 여름, 유일한 벗인 균수(오달수)를 따라 시골 마을 수내리로 농활을 떠난다. 하지만 이 또한 지루하긴 마찬가지. 하루가 지나자마자 서울이 그리워진다.

그러던 차에 사랑을 만난다. 사랑이란 것이 원래 그렇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던 석영은 우연히 편백나무 숲으로 접어든다. 바로 그곳에서 정인(수애)을 발견한다. '빨갱이의 딸'인 정인, 부모도 없이 세상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지만 동화처럼 밝고 순수하다. 그리고 석영은 정인의 내면에 흠뻑 젖는다. 물론 정인도 소년같은 석영의 모습이 싫지 않다.

로이 클락의 '예스터데이 웬 아이 워즈 영(Yesterday When I Was Young)'이 흐른다. '편백나무 잎은 사랑을 부르는 힘이 있다'고 노래한다. 사랑의 싹은 열매를 맺기 위해 진화한다. 그러나 시대가 이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다. 단 한번의 사랑은 유일한 사랑으로 남는다.

슬픈 사랑이야기지만 그 사랑이 아름답고 고귀하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용솟음친다. 또 '품행제로' 이후 4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조근식 감독의 색감도 뛰어나다. 다만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장면에서 극의 흐름이 툭툭 끊기는 면이 없지 않은 점은 아쉽다.

하지만 이 또한 상쇄될 수 있는 것은 주연 배우들의 호연이다. 그들이 내뿜는 여름 향기는 천지가 진동할 만큼 감칠맛난다. 한동안 멜로 영화에 뜸했던 이병헌은 스펙트럼을 한 단계 넓혀 멜로물의 진수를 보여줬다. 20대와 60대를 넘나들면서 보인 희로애락의 모습은 여성팬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수애는 그 자체가 한 폭의 동양화다. 신비한 아우라가 느껴질 만큼 영화의 빛을 한층 맑게 한다.

올겨울 사랑의 환각에 빠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 해 여름'을 권하고 싶다. 30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