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비밀 도청 조직인 '미림' 팀장이었던 공운영(58)씨는 지난 26일 자술서에서 1999년 200여개의 테이프를 자진 반납했다고 밝혔다. 공씨는 자술서에서 "당시 너무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에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감찰실에 반납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은 29일 공씨 집에서 도청테이프 274개와 녹취록 13권(총3000여쪽)을 압수했다.

정보기관 생활 25년에 비밀 조직에서만 10년이나 있었던 공씨가 압수수색이 빤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대악재'인 도청테이프를 이처럼 집에 보관한 이유는 의문이다.

충격이 상대적으로 약한 테이프들만 검찰이 압수해가도록 일부러 허술하게 모아놓고 파괴력이 엄청난 진짜 '판도라 상자'는 은밀한 곳에 따로 빼돌려 '구명용'으로 이용하려 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확실한 것은 공씨가 1999년에는 국정원을 속이고, 이번에는 자술서를 통해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점이다. 공씨가 거짓말을 한 이유는 도청테이프의 이용 가치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공씨는 자술서에서 "도태당할 것에 대비, 일부 중요 내용을 밀반출해 보관해왔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내부에서 도태당하지 않기 위해 써먹을 보호막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공씨는 또 1999년 '삼성 관련 X파일' 도청테이프를 재미교포 윌리엄 박씨에게 건네주고, 박씨와 함께 테이프를 이용해 삼성측에 거액을 요구하다 실패했다. 그럼에도 국정원은 공씨를 처벌하지 못한 채 오히려 '쉬쉬'하면서 공씨의 생계에 도움을 줬다. '걸어다니는 핵폭탄'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정원 간부들과 정·재·관계 유력 인사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정원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이다.

천용택 당시 국정원장 관련 내용이 담긴 '천용택 테이프'를 건네주는 대가로 통신사업 이권을 받았다는 뒷거래 의혹이 제기된 것도 이 때문이다.

옛 안기부 관계자는 "상관에 대해선 (도청을) 하지 않지만, 상관과 친한 인사나 관련 인사들을 도청하면 상관의 사생활이나 활동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공씨는 스스로 "알려지면 세상이 뒤집힌다"고 표현했던 도청테이프를 자신의 마지막 의지처로 삼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공씨는 본보 기자에게도 "나를 보호하기 위해 다 (돌려)주진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공씨가 집에 보관한 테이프들로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삼성과 거래를 시도했듯 다른 사람들에게도 테이프를 이용해 재산상 이득을 얻으려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