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X파일’과 관련해 최근 한 방송사가 국민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처벌 여부에 관계 없이 전면수사를 해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의견이 74.2%에 달했다. 또 녹취록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수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63%였고, 홍석현 주미대사가 물러나더라도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대답도 79.9%로 나타났다.
이처럼 여론은 검찰이 책임지고 이번 안기부 불법도청사건의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는 쪽이다. 검찰 안팎에서 도청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부터 도청테이프에 등장하는 재벌과 정치권 사이의 돈거래 내용까지 낱낱이 조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도청 경로는
안기부 불법도청팀인 ‘미림’의 전 팀장이었던 공운영(58)씨는 1992년 비밀도청조직이 처음 만들어졌고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인 1994년 재구성돼 도청 활동을 했다고 자술서에 적었다. 이와 관련해 미림팀 부활과 활동을 담당하고 지시한 사람이 당시 오정소 안기부 대공정책실장과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 김현철씨로 이어지는 경복고-고려대 출신들이라는 의혹이 제기돼 있는 상태다. 이들이 미림을 배후에서 조종했는지 여부가 1차 규명대상이다. 또 당시 도청 내용이 안기부 대공정책실장-기획판단국장-차장-안기부장-이원종 수석-김영삼 대통령으로 연결되는 채널을 밟아 보고됐다는 전직 안기부 직원의 발언 또한 검찰이 확인해야 할 사안이다. 1994년 미림팀이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누가 이를 결정했는지 역시 핵심사안이다.
◆도청 대상·규모는
공씨는 “도청 범위는 대통령 빼놓고 최상층부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밝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파장은 상상을 넘어선다. 수많은 고위층 인사를 상대로 도청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MBC에 보도된 도청테이프는 삼성그룹의 고위간부와 언론사 사장 간의 대화였으며, 도청 장소도 다름아닌 삼성 관계사인 신라호텔이었다는 점을 통해 당시 안기부의 도청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뤄졌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에 보도된 도청테이프뿐 아니라 국가정보기관이 관여한 도청 행위 모두 그 진상이 철저히 밝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이러한 도청을 지시한 인물이 누구였는지를 수사하지 않을 수 없다. 부서끼리 업무를 공유하지 않고 따로 일하는 정보기관의 특성상 이를 총괄지휘한 인물은 결국 정보기관의 최고 책임자가 아니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다른 테이프 더 있나
국정원이 공씨로부터 수거한 ‘외부유출’ 테이프는 20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씨는 일부만 재미교포 박인회씨에게 넘겨줬고, 나머지는 모두 국정원 감찰팀에 되돌려 줬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국정원 내에 이 테이프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경우 정치공작 등으로 악용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공씨가 말한 대로 다른 기업이나 정치인들까지 무차별로 도청한 것으로 드러날 경우 국가 전체에 미치는 파장이 심각한 수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빈 검찰총장이 27일 출근길에 “남아 있는 불법도청 테이프가 있다면 모두 수거해서 살펴보겠다”고 말한 것 역시 이런 맥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공개된 X파일 내용은 사실인가
일부에서는 삼성이 기아차 인수에 도움을 받기 위해 수십억원을 정치권에 줬다는 녹취록 내용이 그냥 말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실행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해당 정치인들은 공소시효가 10년인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죄의 적용이 가능해진다.
또 이 도청테이프가 공개된 과정과 배경은 물론 1999년 이 테이프로 한 재미교포가 삼성을 협박했다는 의혹도 검찰이 풀어야 할 부분이다. 천용택 전 국정원장과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이 테이프의 존재를 묵인하거나 전달 받았다는 주장 역시 진위가 가려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