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서울에서 열린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6·25전쟁 중 생사를 모르게 된 자들의 행방을 확인하자"는 합의를 보았다. 이미 비슷한 합의가 2002년 9월에 개최된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있었다. 당시 합의문에는 "6·25전쟁 중 소식을 모르게 된 자들의 생사와 주소를 확인하자"라고 되어 있었고 언론에서도 이를 대서특필했다.
우리 가족들은 그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남북한이 휴전 이후 가장 의미 있는 합의를 했다고 뛸 듯이 좋아했다. 꿈에도 못 잊는, 사랑하는 가족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어서 빨리 약속이 이행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후 속개된 실무자 회담에서 북한은 "눈이 와서 못한다" "소재 파악이 어려워서 못한다"를 되풀이하며 우리 납북 피해자 가족들을 몹시 실망시켰다.
우리 정부에 대해서도 서운하기는 마찬가지다. 당사자들이 이미 노령이어서 하루도 지체할 수 없다는 절박한 심경을 여러 차례 호소했지만 우리 정부도 역시 팔짱만 낀 채 납북 피해 가족의 현황 파악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고 북한이 하겠다고 하면 그때 해도 된다는 식이었다. 우리가 서두르면 북한이 오히려 더 협조를 안 한다며 현황 파악도 하지 않는다니 이렇게 심각한 직무유기가 또 있을까 싶다. 우리 정부가 과연 의지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납북 피해 가족들의 시끄러운 호소를 우선 달래놓고 보자는 임시변통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 가족들이 이번 합의에 대해서도 마음 놓고 박수치고 기뻐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전례 때문이다.
우리 단체는 지난 23일 6·25전쟁 납북 사건의 진상을 보다 면밀하게 규명하기 위하여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을 열었다. 개원에 즈음해서 우리는 3건의 미국 국무부 비밀문서를 공개했다. 이 문서들에는 전쟁 당시 요인들의 납북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심각하게 이루어졌는지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들이 기록돼 있다.
1951년 무초 주한미국대사가 도쿄를 통해 본국에 보낸 자료에는 '북으로 강제로 끌려간 민간인'을 2만명으로 엄격하게 추산하고 있고, 1950년에 역시 외교 행낭으로 전해져 간 문서에는 납북 '정치범'의 수를 1만~2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자료들로 미루어 보더라도 납북인사들의 존재는 전쟁으로 인한 불특정 다수의 피해자와는 명백히 다르다. 사상과 이념의 차이에 따라 선별적으로 끌려간 이분들은 대체로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기여한 분들이다.
국가 정체성과 관련해서도 중차대한 이 일에 대해 정부가 손놓고 있는 사이에도 우리 가족들은 쉴 새 없이 뛰고 있다. 전적으로 자비(自費)로 운영되는 우리 자료원에서는 납북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했던 가족으로부터 가까이서 전해들은 자식에 이르기까지 1차 증언자들을 찾아 영상으로 증언을 채록하는 일을 시작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연구원들도 그 절절한 사연에 눈물을 참기가 쉽지 않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이나 책임있는 정치가들에게는 먼 얘기이겠지만 피해 당사자들의 삶 속에 아로새겨져 있는 이 상처는 아직도 생생한 현실인 셈이다.
지난 55년 동안 우리들은 끈질기게 가족을 찾기 위해 국내외에 호소해왔다. 지치면 중단하고, 또 누군가가 시작하고, 그런 끈질긴 싸움을 하고 있다. 그나마 지금이 가장 희망적인 시절이 아닌가 한다. 모처럼 남북한 당국이 다시 한번 6·25전쟁 납북자 생사확인을 약속했으니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우리 가족들의 심정을 생각해서라도 성실하게, 즉각 이행을 위한 절차에 들어가기를 촉구한다.
(이미일·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