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가 일제 말 친일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반민특위(反民特委)에 붙잡혀 갔던 1949년 1월에 춘원은 57세였고 아들 영근은 18세였다. 춘원은 용수(죄수의 머리에 씌우는 통)를 쓰고 수갑을 차고 날마다 트럭에 실려 서대문형무소에서 남대문1가 반민특위를 오가며 조사를 받았다. 어느날부턴가 춘원이 조사를 받으러 형무소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됐다. 불기 없고 이불 없는 한겨울 감방에서 건강이 악화된 것이다.

▶당시 중앙중학 6학년이던 영근은 새끼 손가락을 물어뜯어 혈서를 썼다. “제 아비 이광수를 보석해주옵소서. 아비는 폐병 3기, 신장결핵 등으로 사선(死線)에서 방황한 적이 있습니다. 건강한 이 자식이 대신 갇히겠나이다.” 반민특위가 정밀 검사를 해보니 실제 춘원의 건강은 심각한 상태였다. 춘원은 체포된 지 20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춘원은 허영숙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맏아들 봉근은 여덟 살 때 잃었다. 춘원은 아이들에게 더없이 자상한 아버지였던 듯하다. 틈만 나면 허생전, 율곡선생, 원효대사 이야기를 해주었고 아이의 친구들이 놀러오면 함께 끼어 노래를 부르고 윷놀이도 했다. 그래선지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 다툼이 있으면 아이들은 늘 아버지 편이었다. (막내딸 정화씨가 쓴 ‘그리운 아버님 춘원’)

▶한국 현대사에서 춘원에 대한 평가는 이런 가족사의 평가와는 다르다. 춘원에게는 한국 현대문학의 선구자라는 평가와 ‘민족개조론’으로 친일(親日)의 얼굴을 가린 변절자라는 평가가 함께 따라다닌다. 그래서 그는 “우리 문학사에 내장된 매우 불행한 행복”(장석주)이며,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김현)이다. 이는 물론 일제 말 춘원 스스로가 뿌린 행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춘원은 한국 지성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매듭이고 반드시 넘어야 할 질곡(桎梏)이기도 하다.

▶이영근씨의 딸 성희(미국명 앤 리)씨가 할아버지의 소설 '무정(無情)'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위해 한국에 왔다. 하버드대를 나와 컬럼비아대에서 한국문학 전공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할아버지는 민족을 사랑했지만 동포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도 했다"며 "그런 모순된 행동의 내면을 들여다보겠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모순된 행동'을 이해하는 일은 할아버지가 했던 만큼의 고민과 정신적 깊이를 갖췄을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춘원이 얼굴도 보지 못했던 손녀의 마음의 키가 벌써 그렇게 자랐다는 데 세월을 느낀다.
(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