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국(8·태백 철암초등학교 1학년)군은 오후 4시면 외톨이가 된다. ‘유일한 친구’ 엄마가 식당일을 나가면, 민국이는 밤 10시까지 6시간 동안 12평 석탄공사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그림을 그린다.
민국이가 앓고 있는 진행성 근이영양증은 근육 단백질 결핍으로 전신의 근육이 굳어져가는 희귀병. 치료 방법이 없어 병의 속도를 늦추는 물리치료에 의존한다. 2년 전 다리를 절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증세는 이제 다리는 쓸 수 없고 손과 팔만 겨우 사용할 정도로 악화됐다.
민국이의 즐거움은 크레용을 꼭 쥐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민국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달리는 기차’. 멈춰선 탄차(炭車)가 철로에 늘어선 폐광촌 아이들은 달리는 기차를 많이 그린다.
통신망이 연결된 컴퓨터가 있으면 민국이의 세계는 훨씬 더 넓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민국이 손이 움직일 수 있는 한정된 시간뿐이다. 엄마 윤오목(38)씨는 “움직이지 못하는 민국이를 혼자 두는 것이 늘 가슴 조이지만 근사한 컴퓨터를 사주고 싶어 일을 나간다”고 말했다.
엄마가 하루 6시간씩 매일 고깃집에서 일하고 받는 돈은 월 60만원. 정부가 주는 빈곤층 지원자금 월 20만9000원, 작년 11월부터 나오는 장애인 수당 월 9만5000원을 받지만 일을 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계와 민국이 치료가 불가능하다.
민국이 아빠는 석탄공사 장성광업소에서 갱도를 누비던 탄광 근로자였다. 민국이가 태어난 9년 전, 돈을 벌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서울에서 태백시 철암동 탄광촌으로 살림을 옮겼지만 얼마 후 탄광 일을 그만뒀다.
박일태 장성광업소 선탄과장은 "1985년 광업소에 부임했을 때 7000명이던 직원이 (구조조정을 거쳐) 지금 1500명으로 줄었다"고 했다. 석탄산업의 쇠락과 함께 민국이 아빠도 탄광에서 밀려났다. 엄마 윤씨는 "돈을 벌겠다고 사업을 하다 실패해 빚을 많이 졌기 때문인지 3년째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윤씨는 작년 민국이 아빠를 '가출 신고'했다. 실제로 연락이 끊긴 상태인 데다 서류상 멀쩡한 아빠가 있으면 정부 지원을 못 받기 때문이다. 태백시 철암동에선 정부 지원금을 받기 위해 가족을 가출 신고하고, 주민등록을 바꾸고, 호적을 정리하는 경우가 다반사일 만큼 주민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
민국이는 아이들과 노는 시간보다 홀로 책 읽는 시간이 많아 작년엔 독서활동우수상을 받았다. 경쟁심이 강했던 민국이는 “날 놀리는 아이들을 쥐어박고 싶다”며 투정한다고 엄마는 말했다.
민국이 등하교는 엄마의 몫이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학교가 있지만 여덟 살 민국는 엄마 혼자 업기 힘든 몸무게(23㎏)다. 하지만 엄마는 “또래에 비해 훨씬 가볍다는 생각을 하면 무겁지 않다”고 말했다. 근이영양증으로 소화 기능까지 약화돼 민국이는 밥 두세 술을 먹으면 “가슴이 답답하다”며 수저를 놓는다. 엄마는 체구가 작은 민국이를 업으면 허리가 아니라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엄마 윤씨는 “앞으로 민국이는 머리만 남고 몸 기능을 모두 잃는다고 해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최악의 상황이 오기 전까지 아들에게 해줄 것들(물리치료, 컴퓨터, 함께 놀아주기)를 후회 없이 해주는 것이 엄마의 소원이다. 하지만 가난과 결손가정의 현실은 꿈을 허락하지 않는다.
‘몰락한 폐광촌’ 태백시 철암동에는 민국이처럼 아빠를 타지(他地)에 빼앗긴 아이들이 많다. 철암역 앞 어린이 공부방을 찾는 아이들 20여명 중 “40% 정도가 엄마 아빠와 함께 살지 못한다”고 공부방을 돌보는 태백선린교회 원기준 목사는 말했다. 경제의 뿌리가 뽑히자 가장들이 가족을 남긴 채 객지로, 객지로 돈을 찾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취재팀·진성호 사회부 차장대우 shjin@chosun.com
이항수 사회부 기자 hangs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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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시 철암동 폐광으로 생계막막…한집 건너 빈집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은 198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 석탄산업의 심장부였다. 태백시 장성광업소가 생산한 석탄이 철암동 선탄장에서 분류돼 철암역을 거쳐 영동선과 태백선을 타고 전국으로 뿌려졌다. 한창 잘나가던 70년대 주민수는 3만명으로 추정되며, 집값은 서울과 비슷했다고 한다. 지금 철암 주민은 4000명. 철암동 중심권인 삼방동(11통)의 경우 한 집 건너 빈 집이다. 빈 집은 개 집으로 사용하거나 폐허로 방치되고 있다. 사람들이 석탄 대신 석유를 사용하면서, 1993년 강원탄광이 문을 닫았고 장성광업소도 70대 말 생산량의 27%로 축소됐다. 대체 산업으로 들어선 농공 단지는 입주 업체의 잇단 부도로 주민 생계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인근 사북(카지노)·고한(골프텔)·황지(카지노 직원 거주지와 배후 숙박)로 연결되는 ‘카지노 삼각 경제권’에서도 철암은 철저히 배제됐다. 철암 주민들은 “95년 탄광 투쟁에서 태백주민이 빠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철암은 60~70년대 탄광의 풍광을 잘 보존하고 있다. 주말이면 미술가와 사진가가 이곳에 몰려든다. 하지만 이들도 숙박과 식사는 대개 번화한 황지동에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