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으로 남하하는 길에 비가 스산하게 내렸다. 초가을에 접어든 절기에도 끝내 물러가지 않는 여름 구름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고택인 녹우당(綠雨堂)에 닿자 녹색비로 변했다. 녹우당 처마에 매달린 빗방울이 윤선도의 심상(心象)처럼 한 방울씩 시(詩)로 맺혀 떨어졌다. 단아한 앞뜰에 엉킨 꽃들 사이에 숨어 있을지 모를 자취를 두리번거리는 동안, 때 이른 석양이 앞산에 걸렸다.
여라의(女羅衣·은자의 옷)를 입은 고산이 살찐 물고기를 두름으로 꿰고 시가를 읊으며 마당에 들어설 듯도 하다.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닻들어라 닻들어라 만경창파에 싫카지 용여(容與)하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을 돌아보니 머도록 더욱 좋다” (윤선도, ‘어부사시사’ 중 가을 노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라는 의성어는 정치보다 귀양을 택한, 귀양보다 문학을 택한 사대부의 심사(心事)를 드러내는 절묘한 표기(記表)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언문(諺文)으로 시가를 지으면서 노젓는 소리만은 유독 한문으로 표현했던 데에는 문학으로 망명한 자신을 달래려는 역설이 작용했을 것이다.
42세에 별시에 급제하고 봉림대군의 스승이자 성균관사예, 예조참의를 역임한 그가 남도의 끝에서 은쟁반 같은 시를 쏟아내며 살았다는 것 자체가 드라마틱하다. 또한 당대의 실력자 송시열과 서슴없이 대결하는 불 같은 성깔과 자연을 벗 삼아 삼라만상을 관조하는 예술적 심성이 하나의 가슴에 공존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로 다가오는 것이다.
고산은 두 개의 초상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분열은 없었다. 초상의 한쪽엔 정치(학문)가, 다른 한쪽엔 문학이 있었다. 그가 현종에게 올린 상소문(論禮疏)은 최고의 권력자였던 송시열을 겨냥한 직격탄이었다. “시열은 도리어 문과수비(허물을 감추고 뉘우치지 않음)하려는 꾀가 있어서 예경(禮經)의 글자들을 주워 모아 자기의 뜻에 맞게 부회하니 그 사설이 번거롭기만 합니다.”
서인체제에서 수장격인 송시열에 대한 저항은 곧 죽음임을 모르는 바 아니었거늘, 고산은 스스로 그것을 행했다. 다행히 결과는 죽음이 아니라 유배로 귀착되었다. 그는 흔쾌히 유배지로 향했다. 조선의 정치에서 생존의 조건인 침묵을 지키지 않는 불 같은 성깔은 결국 정치에서 문학으로 전환하려는 잠재된 욕망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고의적 유배이자 문학으로의 길을 여는 춤사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개의 초상은 선이 맞닿는 일관된 심성인 셈이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그는 조정에 남아 있는 세속적인 권력자들에게 그렇게 되뇌고 홀가분하게 떠났다. 임금이 불러 다시 돌아오곤 했지만, 그는 자주 떠났다. “취하야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나리려다/ 배매여라 배매여라 낙홍이 흘러오니 도원이 가깝도다/ 인세홍진이 언메나 가렸나니”(‘어부사시사’ 중 봄 노래).
그의 아호는 고산이었지만, 그는 결코 외롭지 않다. 그의 내면에 잠재된 두 개의 초상이 후손에 이르러 최고의 예술과 학문으로 피어났기 때문이다. 녹우당 옆 유품전시관에 보관된 ‘어부사시사’의 예술 혼은 그의 증손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에게서 부활하였고, 송시열의 주자학을 비판하던 그의 학문정신은 6대 외증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이렇게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진경산수화, 풍속화, 문인화의 시조격인 윤두서의 세밀한 터치를 담은 그림들로부터 증조할아버지의 혼백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윤두서가 그린 인물과 대상들은 규율사회의 그것이 이미 아니다. ‘나무에 매인 말(馬)’은 줄을 끊고 산으로 뛰어올라갈 태세이며, 인물도의 표정들은 논리와 격식을 벗어던진 자연인임을 확증한다. 윤선도가 보길도 부용동에 칩거하면서 바라던 세계의 형상들이 ‘나물캐는 아낙’들의 능청스런 태연함으로 현현되는 것이다.
이런 심성의 대척점에 지극히 논리적인 인물인 정약용이 존재한다. 그는 예술에의 유혹을 과감하게 떨쳐낸 윤선도였다. 주자학에서 관념론적 요소를 걷어내서 실용적 학문으로 만들고자 했던 정약용은 녹우당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선비의 정신을 가다듬었다. 음풍농월하지 말 것, 시를 짓더라도 감정을 제어하고 학자의 기백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그래도 윤선도는 6대 외손의 무례를 용서했을 것이다. 그가 일찍이 떠난 정치(학문)의 초상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