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뾰족한 가시 위에 내리는 눈은/ 찔리지 않으려고 사뿐히
내리네'
한국인으로서 와카(和歌·일본 전통 단시) 명인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손호연(孫戶姸·80)씨가 올해 팔순이다. 손호연은 일제 때 서울에서
진명여고를 졸업한 뒤 이방자 여사 장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지난 60년
동안 2000여 수의 와카를 지었고, 현재 일본 내 최고의 단가 시인 중
한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손호연의 5남매 중 큰딸인
이승신(李承信·더소호 대표)씨는 어머니의 팔순을 기념해서 '손호연
문화기금' 발족을 위한 준비위원장을 맡고 있고, 또 '손호연 한일
문화상' 제정도 추진하고 있다.
‘그대여/ 나의 사랑의 깊이를 떠보시려/ 잠시 두 눈을 감으셨나요’
손호연은 1941년 사가미죠시(相模) 여대의 전신인 데코쿠(帝國)
여자전문대에 재학 중 와카에 관심을 가졌고, 이후 일본 와카의 대가들인
사사키 노부츠나와 나카니시 스스무에게서 사사했다. 손호연은 일본 왕의
신년어전가회(新年御前歌會·일왕 아키히토가 주재한 궁중 와카
낭송회)에 초청받은 바 있고(1998년), 아오모리(靑森)현에는 그녀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일본인 기타데
아키라(北出明·59·일본국제관광진흥회 국내유치부장)가 쓴 전기집
'풍설의 가인 - 손호연의 반세기'(고단샤 펴냄)가 출간되기도
했다(2002년).
이승신 씨는 "어머니는 한일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에서는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고(2000년), 일본에서도 같은 공로로 표창을
받았다(2002년10월)"면서 "같은 공로로 한일 양국 정부로부터 상을
받은 유일한 문화인이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작년10월 어머니의
와카 270여 편을 뽑아 '호연연가(戶姸戀歌)'(샘터 펴냄)라는 번역집을
냈다. "작업을 하면서 많이 울었고, 많이 힘들었지만 또 많이
행복했습니다."
한국 사람이 왜 남의 나라 말로 시를 쓰느냐는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조국을 노래하라는 스승과의 약속을 지켜낸 어머니의 삶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와카의 근원이 우리 조상들의 향가(鄕歌)라는
자부심 속에 손호연이 50년대부터 펴낸 와카 연작집의 제목은
'무궁화'(전5권·고단샤)이다. 내용은 대부분 한복이나 장독대 같은
한국 전통문화를 소재로 민족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얼마전에 타계한 시인 조병화(趙炳華)는 "손호연이 돌아간
부군(夫君·이윤모·전 변리사협회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노래한
시들은 보는 이들 모두의 눈시울과 가슴을 적신다"고 소개한 적이 있다.
마음을 흔드는 연가(戀歌)들이기 때문이다.
‘님은 가신 뒤에/ 시인의 부군다워라/ 들국화에 묻혀서’
'그대 묻힌 묘소 아래/ 별꽃으로 피어나/ 봄마다 새순으로 움트고
싶네'
5·7·5·7·7 운율의 31 자(字) 정형시인 와카는 일본에선 국시(國詩)로
불린다. 일본 정형시에는 와카 보다 짧은 17자(5·7·5) 정형시
하이쿠(俳句)도 있다. 가령 '이 덧없는 세상에서/ 저 작은 새조차도/
집을 짓는구나'(이싸作), '내가 사랑으로 인해 죽으면/ 내 무덤에 와서
울어다오/ 뻐꾸기야'(오슈作) 같은 작품이다. 일본에서는 "시인 3만
명, 가인(歌人) 30만 명, 배인(俳人) 300만 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단시(短詩)의 인기가 높고, 세계적인 평판도 받고 있다. 여기서 하이쿠의
모태가 바로 와카다.
20자 안팎의 짧은 정형시는 한국과 중국에도 있다. 신라시대 노래인
향가를 한 수만 읊어보면 저절로 맥락이 느껴진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온다'('풍요·風謠'
전문)'.
손호연의 몸속에도 통시대적이고 초공간적인 단가의 피가 흘렀던 것인지
모른다. 현재 신장투석과 폐암으로 투병중인 그녀는 '호연연가'에
이렇게 썼다. "우리도 단가의 근원이 우리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향가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 보물단지와도 같은 단가를 다시 닦고
가다듬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으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