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초 세상을 깜짝 놀라게했던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 문부식(文富軾·43·계간지 ‘당대비평’ 편집위원)씨가 최근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조준희)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동의대 5·3 사건 관련자 처리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은 민주화운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경찰관 7명이 죽은 것과 관련하여 사법적 처벌을 받은 것”이라며 “심의위원회가 화재 진상 규명을 하기에 앞서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것은 성급했다”고 비판했다.
동의대 사건 관련자에 대해서도 “진실 규명을 위해 명예회복 신청을 했다지만, 죽은 경찰관들을 배려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문씨는 이달말 출간 예정인 그의 첫 저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삼인출판사)에서 이같은 생각들을 밝혔다. 국가 폭력과 이에 맞선 운동권의 폭력이 맞부딛치며 숱한 비극을 양산한 80년대를 ‘광기의 시대’로 규정한 문씨의 저서는 종래 국가 권력의 폭력성만 비판해온 진보진영의 관성에서 벗어나, 운동권 내부의 폭력성까지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11일 낮 인터뷰를 위해 만난 그는 “집근처 경찰서에 ‘방화살인이 민주화운동이라니, 순직 경찰 영령들이 통곡하고 있다’는 플래카드가 내걸린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었다”면서 “동의대 사건은 사람이 죽은, 생명과 관련됐다는 점에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민주화 보상심의위원회에 당신이 주도한 부산 미 문화원사건을 신청하지 않은 이유는?
“주위에선 신청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하지만 우리 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인명이 희생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보상신청을 해서는 안된다는 내면적 합의가 있었던 것같다. 무고한 죽음 때문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 행복은 보통 사람의 반이라는 자책감을 갖고 있다.”
―동의대 사건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면서 이를 둘러싸고 사회 일각에서 입장의 대립이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민주화운동 인정 여부는 공론 영역에서 충분히 논의를 통해 설득력을 갖추고, 사회적 합의를 거쳐 이뤄져야한다.그렇지 않고 세력간의 힘의 관계에 의해 정치적 정당성이 주어진다면, 곤란하다.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는 경찰관 7명의 사망 원인을 밝힌 후, 그에 따라 조치를 취했어야한다. 위원회 결정은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이 무엇을 주장했느냐에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다. 경찰관이 죽었다는 결과와 분리된, 정치적 입장의 정당성만 논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 규명 이후에 사건에 대한 규정이 이뤄져야했어야 했다.”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의 태도를 어떻게 보는가.
“동의대 사건 자체가 사후에 정치적으로 왜곡, 과장된 측면은 있다. 방화살인범으로 사회적 오명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겪어야했던 고충은 충분히 이해한다. 당사자들은 진상규명이 신청동기였다고 하지만,결과적으로 그 사건으로 죽어간 경찰과 유족들을 공격하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성급했다. 희생자들에 대한 인간적 예의가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그리고 당사자간의 열린 대화를 통해 진상규명에 접근할 수도 있는데, 정치적 정당성을 선점함으로써 진상규명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경찰의 과잉진압을 자꾸 문제삼는데, 그렇다면 학생들이 경찰을 인질로 잡고, 화염병을 던진 폭력에 대한 얘기는 왜 없는가.”
―국가 권력의 폭력을 우선시하지 않고, 민주화 운동 내부의 폭력을 제기하는 것은 진보 진영내에서는 금기나 다름없는데.
“우리 안의 폭력을 제대로 성찰할 때만이 국가 폭력을 제대로 성찰할 수있다. 그래야 사회적 논의 과정에서 국가 폭력의 부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책 표지에 장덕술 군에게 바친다고 씌여있다. 누구인가.
“부산 미문화원 사건으로 죽은 동아대학생이다. 지난 3월 부산 미문화원 사건 당시 도와준 변호사, 신부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갔다. 누군가 장군의 유족을 찾아가 봤느냐고 물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의 이름으로’란 영화에 보면 테러범으로 몰린 주인공에게 진범이 잡혀와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나말고 희생자들에게 사과하라고 얘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 때문에 죽은 장덕술군에게 용서를 구하는 의미로 썼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해 지금 어떻게 생각하는가.
“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현장 근처에 가기가 두렵다. 우리의 행동이 최선이었는가, 끊임없이 되묻고 있다.10여년의 수감생활 끝에 풀려나보니, 이 사건은 반미자주화운동의 선구적 사건으로 규정돼 있었다. 이런 성격 규정에 대해 소외감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이 사건에 대해 물어야할 질문이 많았는데, 80년대의 운동적 필요때문에 생략됐다.”
―부산 미문화원 사건 20년만에 이 사건과 광주 민주화운동 등에 대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20년이 흘렀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사건에서 풀려나지 못했다. 한 번 정리해서 벗어나고 싶었다. 1980년대의 폭력과 광기에 대한, 우리 안에서 던져지지 않은 질문을 묻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