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서 비운의 혁명가 김 산의 자취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황푸강에 떠오른 태양은 그의 넋처럼 장엄하였다.


지음. 망명자의 어머니 상하이에 와 있습니다. 무지개 다리(홍교)라는
이름의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뿌연 하늘 저편으로 무지개 아닌 기나긴
시멘트고가가 뻗어 있습니다. 거대한 절벽들처럼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따샤(빌딩)들의 그 공중고가를 벗어나서야 비로소 도도하게
흐르는 황푸강을 만나게 됩니다.

오랜동안 상하이는 우리에게 육친적인 도시로 다가왔습니다. 이곳
마당루에 우리의 망명정부가 세워지면서 윤봉길을 비롯한 허다한
의인 열사들이 이 상하이의 하늘 아래에 그들의 청춘과 생명을 묻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하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늘 애틋한 짝사랑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상하이는 그러나 이제 사뭇 다른 느낌으로 옵니다.
일찍이 덩샤오핑이 동방명주라고 부르며 중국 희망의
지표로 삼으면서 30층 이상의 빌딩만도 100여 개씩이나 들어서게 되고
황푸강을 사이로 와이탄 푸동 신시가지에는 세계적
금융사들이 밀집한 미래형 경제도시로 탈바꿈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도시에서는 그 옛날 망명자들이 저물녘 가방을 들고 찾아오던 그
푸근하고 어스름한 박명의 분위기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의 홍콩을 옮겨 온 듯 사람들로 넘쳐나는 밝고 활기찬
거리거리마다에는 온통 맑은 종소리도 가득한 느낌입니다.

훗날 혁명가이자 무정부자가 되었던 열혈 청년 김 산이 황포강으로 배를
타고 들어 온 것은 1920년이었습니다. 님 웨일즈의 김 산 전기인
'아리랑'에는 그의 상하이 생활의 시작을 이렇게 전해 줍니다.

1920년 겨울 어느날, 기선 봉천호가 싯누런 황포강을 서서히 거슬러
올라감에 따라 거대한 도시 상해가 도전이라도 하듯이 강안으로부터 그
윤곽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나도 거의 만 십 육 세가 되었으므로
두렵지는 않았다…. 저녁이면 나는 한국인성학교에 가서
영어를 공부하였다. 그 밖에 에스페란토어와 무정부주의 이론도
공부하였고 틈이 나면 상해에서의 한국인의 생활과 활동을 모든 면에
걸쳐서 조사하였으며, 상해에 망명해 있던 모든 한국인 혁명가들과
친하게 되었다. 또한 전차를 타고 시내 곳곳을 둘러보기도 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상해는 새로운 세계였으며 서양의 물질문명과 움직이고
있는 서구 제국주의를 처음으로 본 곳이었다. 나는 모든 풍요로움과 모든
비참함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여러 나라 말이 사용되고 있는, 이 드넓은
도시에 매료되었다.

처음 마차삯을 깎아 임시정부사무소까지 80센트에 가기로 하고 찾아간
그곳에서 이제 갓 소년티를 벗어난 김 산은 안창호, 이광수, 이동휘 같은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의열단원들,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하게
됩니다. 상하이는 그에게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문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마오쩌뚱의 혁명 본거지이자 사상의 도시 옌안에 파견 와 있던
서양의 여기자 님 웨일즈가 한국의 청년 혁명가 김 산의 전기를 쓰게 된
것은 루쉰도서관의 영문책 대출 건으로부터였습니다. 님
웨일즈가 빌려보려 하는 영문 단행본과 잡지마다 한꺼번에 수십 권 씩
먼저 대출해 간 사람이 있었고 그 이름이 바로 김 산이었던 것입니다. 그
방대한 양의 영문 책을 빌려갈 정도의 사람이라면 영어실력이 보통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여기자 님 웨일즈는 그 대출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하여 어렵게 주소를 알아낸 다음 수차 한 번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내었지만 답장은 없었습니다. 도서관 담당자가 알려준 김 산이라는
사람은 한국인으로 당시 중국에 머물면서 한 대학에서 일본어와 경제학
그리고 물리학과 화학 등을 가르치고 있는 수재라고 했습니다. 더욱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누군가가 그는 한국의 한 소비에트 정치
세력으로부터 극비에 파견되어온 대표이고 외부인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해주었고 님 웨일즈는 만남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 붓던 어느 날 김 산이 직접 님 웨일즈의
사무실로 찾아옴으로써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첫 만남에서 님
웨일즈는 김 산의 수려하면서도 단아한 용모와 빛나는 감성에 크게
매료됩니다. 음영이 짙은 우수의 얼굴을 한 청년 김 산을 처음
대면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만났던 또 한 사람의 한국인, 중국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영화황제라는 칭호를 들었던 영화배우 김 염을 생각하였고,
이 영혼의 깊이가 느껴지는 잘 생긴 두 사람의 한국남자를 통해 미지의
나라 한국을 깊은 호감 속에 인식하게 됩니다.

'아리랑'은 주로 청년 김 산이 자신의 조국이 처한 현실과 일본의
야만성 그리고 김 산 개인의 이상과 고뇌와 사랑에 대해 영어로 말하면
님 웨일즈가 질문하며 받아 적는 것으로 시종하고 있습니다. 빛나는
미래를 보장받은 한 의과대학생이었던 김 산이 어떻게 혁명가가 되어
이역산천을 헤매야 하였으며 어떻게 사랑했던 여인과 헤어져 중국의
대혁명에까지 참가하게 되었고 어떻게 개인사를 희생시키고 민족사의
앞날을 열어보려 고투하였는가를 그녀는 거의 종교적인 숭고함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지적 열망과 아름다운 혼과 우수의 얼굴을 지닌 청년 김 산은
서른 살을 갓 넘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일본 스파이로 몰려 극비리에
처형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물론 김 산의 최후에 대해서는
쓰고 있지 않지만 그의 생애가 결코 순탄하게 전개되지 못하리라는
것만은 도처에서 암시하고 있습니다. 운명처럼 한 서양 여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난 뒤 얼마 안되어 이 너무도 아름다운 한국의
청년은 그 생애의 종장을 맞게 된 것입니다.

청년 김 산이 드나들었던 옛 대한민국 임시 정부 건물은 말끔하게 새
단장이 되어 십여 년 전 처음 들렀을 때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변만은 옛 분위기 그대로였는데 나는 비로소 그
낡은 풍경들에 안도가 되는 것을 느낍니다. 목조 2층의 집들마다
널어놓은 빨래며 이불 호청 같은 것들, 길거리에 세워둔 낡은
자전거들이며, 하릴없이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의 풍경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지나간 시대의 단면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거리의 풍경 속에서 나는 치열하게 살다가 꽃잎처럼 떨어져 간 한
젊은 혁명가의 초상을 더듬어 봅니다. 처형을 앞두고 찍은 한 장의 흑백
사진 속에서 당당하게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오만한 그러면서도 알
듯 모를 듯 미소짓고 있던 그 표정의 초상을 말입니다.

지음.

사람들은 이제 민족, 사회 혁명 같은 대의를 잘 입에 올리려 들지
않습니다. 한 때 이 도시에도 혁명의 피바람이 거세게 불고 지나갔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빛 바랜 전설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전설의 한가운데에 목놓아 울다 떠난 한국 청년 김 산의 이름이
풍화되어 남겨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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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산(1905-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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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봉천 출생. 본명은 장지학. 혁명가 시인 사상가
무정부주의자. 1919년부터 1938년까지 옌안, 상하이, 광저우, 베이징 등
중국 대륙을 누비며 자신의 생애를 민족해방과 혁명에 던졌던 인물.
만주의 조선독립군군관학교, 텐진의 난카이대학을 거쳐
베이징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37년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에드가 스노의 부인으로
신문기자였던 님 웨일즈를 만나 3개월 간 20회의 구술을 통해 신비와
고뇌에 찬 자신의 짧은 생애를 밝혔고 '아리랑'(Song of Arirang-The
Life of A Korean Rebel, by Kim San and Nym Wales/1941, John Day Co.,
New York)이라는 제목으로 뉴욕에서 출간되었다.

님 웨일즈가 '현대의 정신을 소유한 실천적 지성'이라고 격찬해
마지않았던 그는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반혁명 간첩 혐의로 몰려 33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 화가 / 서울대 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