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일제시대 도쿄 명월관의 실체가 드러났다. 서지학자 이종학씨의 자료 공개로 드러난 명월관은 일본의 정·관계인사들이 식민지 조선통치를 기획하고, 의견을 나누던 밀실정치의 거점이었다. 조선총독부 고위관료들과 당대 부호들이 드나들던 서울의 명월관과 마찬가지로 도쿄에서 고급 사교클럽 역할을 했던 셈이다.
명월관이 자리잡은 도쿄 고지마치구 나가타조는 일본 국회의사당과 수상관저 인근으로, 고급 레스토랑과 요정이 밀집한 곳이다.
요즘도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 술집 지역 아카사카가 지척에 있다. 일본의 조선 관련 고위인사들은 최고급 조선 요리와 전통공연을 레퍼터리로 갖춘 명월관을 자주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건축사학자 김정동 목원대 교수에 따르면 이곳에서 조선총독부의 인사들의 송별식·환영식이 자주 열렸다.
춘원 이광수도 도쿄 명월관을 방문한 기록을 조광 1937년3월호의 ‘동경문인회견기’에 남겼다. 와세다대 은사였던 요시다 교수와 야마모토 개조사 사장 등 문인들과 일본식 고급요정에서 저녁을 함께한 춘원은 조선 요정에 가보고 싶다는 주위 권유에 따라 2차로 명월관을 찾는다.
“명월관은 상당히 고급건물이었다. 집도 좋거니와 정원도 밤에 보아 자세히는 알수없어도 상당한 모양이었다. 어린 기생도 4~5인 있었다.” 춘원은 그러나 음식은 그다지 맛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월관은 ‘조선 문화의 창구’라는 나름대로의 인식 아래, 식당을 찾는 일본 엘리트 계층에게 우리 문화를 소개하기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명월관이 자체적으로 펴낸 일본어 소책자 ‘조선독본’(김정동 교수 발굴)에는 식사할 때는 연장자순으로 상주위에 앉고, 좋은 음식은 어른이 먼저 손을 댄 후에 먹고, 수저를 조용하게 움직인다는 등의 음식먹는 예절을 자세하게 적었다.
‘조선독본’에는 이와함께 “명월관의 조용하고 풍취있는 정원을 바라보며, 흐르는 작은 물결소리를 들을 때 총림괴석은 금강산을 생각나게 한다”며 “금강산 소나무의 과실을 입에 넣고 인삼주를 마시며 선녀같은 조선 기생의 춤을 감상할 때 선경을 노니는 길몽에 취하시기 바란다”고 선전하고 있다.
명월관이 있던 나가타초 2의 82번지에는 그 후 특급호텔인 뉴저팬이 들어섰다가 1980년대 중반 화재로 소실됐다. ‘조선독본’에는 명월관 주인이 노경월이라고 나와있는데, 그는 평양 기생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명월관의 인기와 명성에 힘입어 일제 시대 도쿄에는 나가타초 명월관과 시기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간다와 신주쿠 등 몇군데에도 ‘명월관’이란 이름의 요릿집이 영업했던 것으로 문헌들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