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걸들이 조선일보를 만들었고 조선일보는 한국의 인걸들을
만들었다.'
1920년 3월 5일 조선일보의 창간은 무엇보다 민족지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는 의미가 컸다. 이상재 조만식 안재홍 신채호 문일평 이상협
홍명희 등이 조선일보를 터삼아 식민지하에서나마 「민족의 발언」을 했다.
일제 시대 조선일보 편집국.(위) 좁고 낡은 사무실이지만 일제에 항거하는 기개와 정신이 살아 숨쉰 공간이었다. 현재의 조선일보
뉴스룸은 첨단 편집조판 장비인 [C(코러스)3]을 중심으로 흰색의 초현대적 사무 가구로 2000년 1월 1일 새단장했다.
창간한 해 6월1일자부터 3·1운동에 대한 탄압과 잔혹성을 폭로한 ‘골수에
깊이 맺힌 조선인의 한’이 연재되기 시작했다. 결국 6월10일자 10회로
중단되고만 이 시리즈로 인해 경영진이 사퇴압력을 받아 결국 부사장 예종석과
기사를 쓴 최국현 방한호 등 3명의 기자가 축출됐다. 그럼에도 독립운동
관련기사는 이후 조선일보 단골 메뉴로 자리잡았다.
1924년 이광수 주도의 타협적인 자치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광수가
'민족적 경륜'이라는 논설을 발표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이 논설의 요지는
'일본 법률의 범위 안에서 정치 산업 교육의 3대 정책을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처음부터 자치론을 배격했다.
1924년 9월 13일 독립운동가 신석우의 조선일보 인수는 편집진뿐만 아니라
경영진까지도 확고한 민족주의 세력이 조선일보를 장악하게 됐음을 의미했다.
이 때 나이 30세였던 신석우는 민족의 사표로 존경받고 있던 74세 고령의 월남
이상재선생을 제4대 사장으로 추대했다. 이로써 조선일보는 명실상부한 '조선
민중의 신문'으로 다시 태어났다. 조선일보 개혁에 대해서는 해외의 박은식
서재필 등도 특별기고문을 보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신석우는 10월3일 경영진과 편집진을 대폭 개편했다. 주필 안재홍 고문
이상협 편집국장 민태원을 임명했고 기자진용도 확대했다. 논설반은 안재홍
김준연 신일용으로 구성됐고 사회부에는 좌익계의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도
포함돼 있었다.
자치론 배격과 좌우통합을 근본정신으로 1927년 출범한 신간회 운동을
조선일보가 주도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자치론이 시류였다면 신간회는
시대정신이었다. 그러나 1931년 신간회 해체 직후 5대 사장 신석우는 사학자
안재홍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상해로 망명했다.
이 무렵 조선일보 기자로는 김기림 김기진 김동환 김을한 김준연 민태원
백관수 심훈 안석주 염상섭 유광렬 이관구 이관용 이길용 이서구 이선근
이여성 장지영 조봉암 한기악 현진건 홍명희 홍기문 등이 활약했다.
'임꺽정전'의 홍명희와 역사학자 홍기문은 부자가 모두 조선일보 기자로서
문명을 날린 희귀한 케이스였다. 외부필진으로 단재 신채호는 1931년 103회에
걸쳐 '조선상고사'를 연재했고 이어 '조선상고 문화사'도 연재했다.
1933년 편집고문으로 입사한 역사학자 문일평은 역사대중화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안재홍과 함께 '조선학'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지속되는 경영난으로 조선일보 판권이 고리대금업자에게 넘어가는 일도
있었다. 조병옥과 주요한이 운영권 인수에 나서 사태는 일단 수습됐고 8대
사장으로 조만식이 취임했다. 조병옥은 전무, 주요한은 편집국장을 맡았다.
여전히 재정문제는 심각했다. 실질적 소유주인 고리대금업자의 횡포는
계속됐다. 결국 조만식이 나서 계초 방응모에게 조선일보 전권인수를
요청했다. 간곡한 권유에 방응모는 금광인 교동광산을 135만원에 팔아 그
자금으로 조선일보 인수, 간척사업, 조림사업, 장학사업에 투자키로 결단을
내렸다. 1933년 3월 22일 방응모는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조만식이 사장,
방응모가 부사장이었다.
방응모의 등장과 함께 조선일보는 급속하게 현대적 신문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타지와의 본격적인 지면경쟁-속보경쟁도 이 때부터 시작됐다.
민간지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의 활약이 두드러지자 다른 신문들도 서둘러
여기자들을 뽑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의 허정숙, 중외일보 김말봉, 매일신보
노천명 조경희도 그렇게 해서 등장했다. 성장을 거듭하던 조선일보는 그러나
1940년 8월 10일 총독부의 폐간령에 따라 4면으로 발행한 8월11일자 조선일보를
끝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는 복간됐다. 복간호에는 '민중과 함께 나가라'는
이승만박사의 글과 '이목과 순설이 되라'는 벽초 홍명희의 글이 함께 실렸다.
백범 김구선생도 친필 휘호를 보냈다.
'영원한 대기자' 홍종인의 족적은 크고도 넓다. 1929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이래 폐간으로 인한 잠깐의 외도기간을 제외하고는 1963년 조선일보 회장을
맡을 때까지 일생동안 고난과 시련을 조선일보와 함께 했다. 1956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58년 편집국장을 맡은 천관우는 참신한 아이디어로 조선일보를 혁신시켰다. 1959년 조선일보에 논설위원으로 참여한 최석채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사설로 4·19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을 받았다. 이로써 조선일보는
민권지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다졌다. 이어 기억해야 할 인물이 선우휘다.
'불꽃'의 작가이기도 한 선우휘는 선굵은 기개의 논객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의
서슬 퍼렇던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한 글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선우휘'라는 이름과 함께 기억하는 명논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