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력시위, 이간질, 학살...일군부도 잔인성 자인 ##.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던 바로 그 전 해인 1904년에 설치된 일
본군의 조선주답군 사령부 설치 취지는 이렇다.
'러시아의 위세가 강대함에 비하여 일본의 실력은 과소평가되어
반일모일 풍조가 한국 조야에 충만해있는지라, 이들 맹동을 봉쇄하고
한쪽으로 민간 지사들의 결합 단체인 일진회와 맥락하여 치안을 유지
하고 한국민이 일본군에게 협력하도록 도출하여 나아가 압록강군 편
성 기반을 다져 만주에 진출하기 위함이다'.
한말의 군대 해산후 일본군 사령부에 편입한 조선군 고급 장교들. 왼쪽에서 세번째가 군부대신을 역임한 이병무, 네번째가 고종의 왕자인 이강 중장, 여섯번째가 조동윤이다.
그리하여 그해 4월 3일 서울 성안의 대관정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초대 사령관에 하라다(원전겸제) 소장을 발령했다. 이렇게 발족한 조
선군사령부가 패전으로 1945년 12월 20일에 해산하기까지 41년간에
걸쳐 군사령관 21명을 경질하고 있다.
이 사령부의 맨 첫 과제가 을사조약 강제 체결을 위한 공포 분위
기 조성이었다.사령부에는 13사단과 15사단을 휘하에 두었는데, 서울
시를 제압한 것은 주로 전자로, 아무런 통고나 목적도 없이 황제가
계신 덕수궁 앞을 중심으로 한 무력 시위를 하고 남산에는 야포를 줄
지어놓고 사격 훈련을 밤낮으로 했다.
이 조선군의 두번째 임무가 군대 해산에서 야기될 무력 반발을 진
압하는 일이다. 현재 일본 방위청에 보관되고 있는 당시 기밀 문서
가운데에는 이 사태를 예상, 각지에 훈련 파견시킨 한국인 밀정 일람
표가있다. 거물급은 80원, 중급 첩자는 50원, 말단 첩자는 30원씩 정
보비가 지급되었으며, 그 매국 행위자가 너무나 많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여 군대 해산이 의병으로 연결되어 전국에 번져나
갔고 다음과 같은 격문이 팔도에 나붙었다.
'우리는 일본놈 집들을 불태울 것이요 놈들 목을 날릴 것이다. 그
리하여 너희들 살점을 2000만 동포가 씹게끔 2000만 조각을 내리로
다. 또한 너희들 피를 2000잔을 내어 온동포가 마시리로다'.
한데 오히려 우리 민족이 일본군에게 역으로 그 꼴을 당하고 말았
다. 의병 혐의가 있거나 의병을 숨겨준 혐의가 있으면 땅에 구덩이를
파 반신을 생매장하고 목을 날리는 연습을 하는가 하면, 물을 강제로
먹 여배를 부풀려 놓고 그 배 위에 널판지를 얹어 짓누름으로써 물을
뿜게하여 즐겨가며 죽이기도 했다. 영국인 매킨지가 충청도 지방 의
병 활동을 둘러보고 쓴 기록을 보면, 일본군은 가는 곳마다 의병 유
무를 가리지 않고 불지르고 주민들을 잡아다 벌레 죽이듯 죽였다는
견문들이 생생하다. 이 조선군사령부의 만행에 대해 일본 내부에서도
지탄이 없지 않았던지 그 만행을 이렇게 합리화하기도 했다.
"인도에서 용병 반란이 있었을 때 영국군은 수도에 진격, 인도제
국부활을 선언한 무갈 황제를 체포, 유배하고 왕족을 몰살했다. 프랑
스는 베트남 마지막 임금 성의제를 사하라 사막 복판에 유폐했다. 영
국은 반란이 일자 버마(미얀마) 최후의 민둥왕과 왕비를 소달구지에
묶어날라다 배 속에 가두었다." 이 세 가지 사례를 들어 침략군치고
일본군은 악랄하지 않다고 대대적으로 계몽했다.
한술 더 떠 일본은 유신 직후 기도의 발의로 한국 대안에 있는 야
마구치현 출신 정치가나 군인을 주로 한국에 파견하여 조야의 반대나
만행을 극소화하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야마구치현은 백제나 신라 유민이 가장 많이 정착, 그곳 출신은
어떤 형태로든지 한국의 피가 섞였다는 것이 상식이 돼있었다. 그리
하여 초대 공사인 이노우에 초대 통감 이토 초대 조선군 사령관 하세
가와 초대 총독 데라우치가 바로 그 쪽 출신이라는 것이다. 사실이라
면 보다 악랄한 침략 정치가 아닐 수 없다.
침략 일본이 군대 해산을 작심한 데는 그동안 정략적으로 육성해
온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이미 한국군 상층부를 휘어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군 사령부는 군대를 해산하면서 완충 단계로 사령부
소속으로 구한국군 고급 장교들의 친위부와 하급 장교들의 조선 보병
대를 두어 육사 출신을 주축으로 한 친일 장교들을 소속시켜 이간질
했다.
친위부에 소속된 육사 출신으로는 군부대신을 역임한 이병무(부장=
중장), 군부차관을 역임한 이희두(참장=소장), 참모총장을 역임한 조
성근 참장, 그리고 시종무관을 역임한 어담 정령(대령), 무관학교 학
도대장을 역임한 권태한(부령=중령) 등 일본 육사 8기에서 15기까지
깔려있었다. 또 실권 없는 황제와 황태자의 시종무관으로 한말 외교
를 도맡았던 조대비의 친정조카 조영하의 아들 조동윤 부장, 8기생인
신우균 참령, 11기생인 김형섭 참령, 15기인 김응선 참령 등이 소속
되었다.
김응선은 우쓰노미야 조선군사령관이 청일전쟁 때 평안도에서 데
려가 일본에서 소학교부터 사관학교까지 가르쳐 노일전쟁에 참전시켰
으며,이토가 영친왕을 일본에 강제로 데려갔을 때 영친왕 시종무관으
로 데려갔던 사람이다. 그리하여 우쓰노미야가 사령관으로 있을 때
'김응선의 아버지'로 속칭되었던 것이다.
속칭 총알도 없는 총을 메고 임금도 없는 대궐을 지킨 것으로 소
문난 괴뢰병 조선군사령부 소속 조선 보병대 대장으로는 왕유식 정령
으로 군부의 보병과장을 역임한 8기생이었다. 이렇게 조선군사령부에
가 붙은 일본 육사 출신들은 일본 군인과 동등하게 진급하여 어담-조
성근은 중장까지,왕유식-김응선은 소장, 김형섭-박두영은 대좌까지
진급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이 조선군 사령부의 회유책을 뿌리치고 민족
진영에서 항일 투쟁에 투신한 분도 없지 않다. 11기생인 노백린 정령
은 무관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군대 해산 직후 고향에 내려가 비밀 결
사에 관여하다가 망명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또 15기인
군부대신 부관이던 이갑 참령과 기병대장 유동열도 군대 해산과 더불
어 항일전선에 뛰어들었고 11기생인 김희선은 국외로 망명, 광복운동
에 투신했다.
조선군사령부가 할 일이 하나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3.1 독립
운동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잔인무도했던 그 많은 군부의 탄압상 가
운데 하나를 사례로 들어본다.
일본 군인들은 심문 끝에 십자가를 늘어놓고 너희 신자들은 그리
스도가 그러했듯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할지어다 했다. 서울 고등여자
보통학생인 노영열은 옷을 벌거벗겨 십자가 위에 뉘었다. 숯불에 붉
게 달군 집게로 젖꼭지를 지지고는 사지가 이골이 나고 피부가 벗겨
지도록 팔방으로 잡아당기며그래도 만세를 부르겠는가고 다졌다. 사
흘을 굶기고 닷새를 고문해도 굴복하지 않자 화가 난 일본병이 군도
를 빼어 입을 찌르려 들었다. 이에 상관이 얼굴에 상처를 내서는 안
된다고 만류하기도 했다. 그래서 3·1운동은 일본군의 새디즘을 충족
해주었다는 일본 국내의 비난 여론마저 일었다.
1919년 9월 27일 비밀 문서에 당시 우쓰노미야 조선군사령관의 훈
시가 실려있는데, 소요를 진압하며 불필요한 잔학 행위로 말썽을 빚
고 있음을 시인하고 검거 수사하는 것은 행정 관청이 하는 일이요 군
은 소요를 막는 일에만 종사한다는 직분 구분을 엄하게 할 것을 훈시
하고 있다. 군부의 잔인 행위를 자인하는 문서가 아닐 수 없다.
이 조선군에 소속됐던 한국인 영관급 장교는 1934년 9월 현재 다
음과 같다. 용산 20사단의 대대장으로 있던 이응준 소좌(소령)를 비
롯, 박승훈 소좌, 유승렬 소좌, 남우현 소좌, 백홍석 소좌, 김석원
소좌가 있었으며 함경도 나남에 있었던 19사단에는 신태영 소좌, 안
병범 소좌, 정훈 대위,군사령부에는 이대영 소좌, 관동군 사령부에는
후에 육군중장으로 전범이 돼 처형당한 홍사익 중좌, 윤상필 대위가
있었다.
1937년에는 '조선인 특별지원병 조례'를 만들어 서울과 평양에 지
원병 훈련소를 만들어 훈련시켜 조선군사령부에 입대시켰다. 그리하
여 조선 장정 5만5000명을 강제로 전선에 투입한 증병제가 실시됐던
1943년까지 해마다 3000∼5500명씩 한국인 지원병을 뽑아 사령부에
배속시켰던 것이다.
필리핀에서 패배한 일본은 1차 방어 전선으로 오키나와를, 다시
밀렸을 때 제주도를 2차 방어 기지로 삼고 섬 주민 17만명을 강제로
본토에 소개해 진지 구축에 나섰다. 조선군사령부 대신 17방면군으로
개편하고 패전하던 해인 1945년 3월에 97사단을 제주도에 파견하고 4
월에는 58군 사령부로 승격시켜 5월에 혼성 127여단을 신설하고 만주
로부터 111사단과 122사단을 증파한 것이다. 그리하여 종전 당시 한
국의 일본군 총병력은 23만으로38선 이남만은 지상군 13만 항공군 4
만으로 17만을 헤아렸다.
이 제주도 결전은 부질없는 망상으로 끝나고 모슬포 들판에 싸우
지 않은 전적만을 남겼다. 한반도에 주둔할 미24군 사령관 하지 중장
이 휘하 7사단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 9월 16일 구총독부 중앙
홀에서 항복 조인식이 벌어졌다.
흥미있는 것은 조인이 끝나고 승장인 하지 중장과 패장인 일본군
사령관인 고모다의 친근감 넘치는 악수로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했
다. 적장에 대한 증오와 승자로서 우월감이 없는데다 또 패자로서 울
분이나 치욕이 완전히 증발한 악수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지와 고모다는 이 전쟁 이전에 프랑스 육군대학에 유학했던 동기
동창생이었던 것이다. 기구한 만남으로 한반도의 병권이 교체된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