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앵커리지 ##.

방일 이틀째인 1961년11월12일 저녁 6시30분부터 숙소인 영빈관에선
박정희 의장 초청 만찬이 있었다. 이케다 수상, 고사카 외상 등 일본의
정재계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만찬이 끝난 뒤 박정희는 초청된 재일동
포 대표 50여명을 만났다. 이 자리에는 서독의 차관도입 교섭을 위해서
출국한 정래혁 상공부 장관과 박태준 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장, 그리고
이영진 대한조선공사 사장도 나타났다.


사진설명 :
조디 먼디 장군의 안내로 앵커리지 공항 전시장에서 박제된 백곰을 구경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신동식(67세,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 역임, 현재 한국 해사산업연

구소이사장)은 서울대학교 조선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국내

에선 조선기술을 펼 수 있는 무대가 없음을 알고는 스웨덴으로 유학길

에 올랐다가 영국 로이드 선급협회의 국제선박 검사관이 되었다. 이 무

렵 신동식은 일본에 주재하면서 일본에서 건조되는 선박에 합격 판정을

내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날 아침 주일대표부에서 신동식에게 영빈

관으로 나오라는 전화를 걸어왔다. 신동식은 박정희 의장에게 소개되었

다. 박정희가 가운데 앉고 그 주위에 수행원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방

에 들어갔다. 박 의장은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청년 신동식에게서

큰 감명을 받은 듯 일어나서 악수를 청했다.

한 군복입은 수행원이 신동식에게 다가오더니 "당신이 신동식이요?
한국에 가서 같이 일합시다. 우리하고 돌아갈 준비를 하시오"라고 명령
조로 말했다. 신동식은 이 말을 들으니 울화가 치밀었다. 유학차 출국
할 때 여권을 발급받는 것이 형무소를 출감할 때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이 떠올랐던 것이다. 신동식은 칵테일을 한 잔 마신 기운을 빌어 울화
를 쏟아부었다.

"가슴에 훈장을 달았다고 이렇게 애국을 강요해도 되는 겁니까. 제
가 오늘 이렇게 국제적으로 성공했다고 조국으로 돌아가자고 하시는데,
제가 출국할 때는 여권을 순순히 발급해주셨습니까? 제가 외국에서 고
생하면서 공부할 때 언제 장학금이라도 대주신 적이 있습니까?".

박정희 의장이 나서서 신동식을 진정시킨 다음에 수행원들을 소개시
켜주었다.

"이렇게는 워싱턴으로, 이렇게는 서독으로 갑니다. 중공업 발전을
위해서 차관을 구하러 가는 길입니다. 여러 가지 구체적인 계획은 있지
만 바다와 관련한 조선-해양분야가 미흡합니다.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도움을 주면 좋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술김에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조국에 대
하여 좋은 추억이 별로 없습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조선공학과를 졸업
할 때 해무청장 상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시상식 날 총무과장이 술을
마시고 출근을하지 않는 바람에 시상식은 취소되고 우편으로 상장을 받
은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유학차 조국을 떠날 때도 가족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저의 장도를 축하해주지 않고 오히려 질시의
눈길만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일분일초도 조국을 잊어본 적이 없
습니다. 지금 저의 서명이 없으면 일본에서 건조된 선박의 인도가 불가
능할 정도의 위치에 있습니다만 무조건 애국을 강요하진 마십시오. 제
가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일본은 우리에게 좋은 교과서입니다. 제가
북해도에서 시모노세키까지 일본의 조선공업시설과 공단을 안내해드릴
테니 꼭 한번 시찰하고 가시죠.".

이 말이 떨어지자 한 수행원이 "젊은 사람이 건방지군. 네가 뭔데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라고 했다. 박정희 의장은 또 그 말을
제지하더니 이영진 대한조선공사 사장을 향해서 "일정을 며칠 연기하시
고 이 청년과 함께 둘러보고 가시죠"라고 지시했다. 신동식은 속으로
'나같은 사람을 이렇게 감싸주는 이 분은 보통사람이 아니구나'하는 생
각을 했다고 한다. 다음날 신동식은 일행을 안내하여 일본의 여러 조선
소들을 돌아다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신동식은 로이드 선급협회에
휴직계를 내고 귀국하여 경제기획원장관 고문으로서 우리 나라 조선공
업 발전의 터전을 닦는 역할을 맡게 된다.

박정희 의장 일행은 이날(11월12일)밤 하네다 공항에서 노스 웨스트
여객기에 올랐다. 30시간의 바쁜 방일일정이 끝난 것이다. 박정희와 수
행원들은 일등실 전부를 전세내었다. 여객기는 알라스카 앵커리지를 향
해서 기수를 돌리고 태평양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날 한국은행은 통계를 잡을 수 있는 세계40개국의 국민소득을 비
교분석한 자료를 발표했다. 1인당 국민소득(1959년 기준)에서 세계1위
는 미국으로 2,250달러, 2위는 캐나다(1,521달러), 이어서 스웨덴(1,387
달러), 스위스(1,299달러). 영국은 1,023달러로 여덟번째, 서독은 833
달러, 일본은 1인당 국민소득이 299달러로서 세계랭킹 25위로 나타났다.

한국은 끝에서 다섯번째인 1인당 78달러였다. 타이, 콜롬비아, 필리
핀, 그리스, 터키, 브라질, 남아연방은 1인당 100∼400달러로서 한국보
다도 훨씬 앞서 있었다. 인구밀도는 한국이 세계 제4위인데 인구증가율
은 연 2.9%로서 세계 제6위라고 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축에 든 대한민국의 짐을 진 44세의
깡마른 지도자가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나라의 지도자를 만나러 가는
길,박정희의 마음은 착잡했을 것이다. 전용기도 없어 미국 여객기의 한
구석을 빌어 탄 혁명정부의 대표들은 노스 웨스트 항공사에서 일부러
신경을 써서 내어놓은 한식 저녁을 먹지 못했다. 영빈관에서 만찬을 한
지 몇시간밖에 흐르지 않아 식욕이 동할 리 없었다. 박정희는 한일 정
상회담을 보도한 일본 신문들을 일별하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일
부 변경선을 지난 노스 웨스트 여객기가 앵커리지에 도착하니 12일 오
전 9시30분이었다. 알라스카 사령부 사령관인 조지 먼디 공군중장이 출
영했다. 먼디 중장은 박 의장에게 "이 공항이 민간용이기 때문에 군의
장대의 환영의식을 베풀 수 없어서 죄송하다"고 사과부터 했다. 먼디는
"다음 기착지로 떠나실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기자회견을 하시든지 시
내 구경을 하시든지 택일하시라"고 했다. 박 의장은 외국을 방문할 경
우 그 나라의 정상을 만날 때까지는 기자들에게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시내관광을 선택했다. (계속).

(*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
(* 이동욱 월간조선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