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②이유 있는 꼴찌 ##.

영웅에게 있어서 숙명이란 것은 눌러도 눌러도 튀어오르는 생명력 같
은 것이리라. 박정희는 태아시절에 이미 어머니로부터의 집요한 공격을
받고서도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최초의 관문을 통과하였다. 대구사범
에 진학할 때도 어머니는 아들이 떨어지도록 빌었으나 정희 소년은 합격
함으로써 상모리를 떠나게 되었다. 박정희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에서 농사꾼으로 주저 앉았다면 그의 운명과 이 나라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사진설명 :
대구사범 5년 중 3년간 그는 꼴찌권을 맴돌았다. 품행평가도 '양'이 네번,
'가'가 한 번이었다. 그는 군사 및 체육관련 과목에서 뛰어났다. 이 성적표는
그의 집권기간에는 공개금지가 되어 있었다. 항상 생각하고 눈매가 날카로운
학생이었지만 동기생 중 아무도 그의 장래를 예측할 수 없을 만큼 평범하였다.

구미보통학교 시절에 이 소년의 마음밭에 뿌려진 어떤 소질의 씨앗
이 대구사범시절에 인격의 틀을 갖추면서 자라난 점에서 5년은 중대한
기간이었다. 성적표로만 본다면 박정희 학생의 이 5년은 대실패였다. 천
상에서 골짜기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성적표는 대구
사범의 후신인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공개를 금지시켜 왔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박정희의 집권시절에 나온 전기류에서는 1등
만 한 구미보통학교의 성적표는 소개하면서도 사범학교시절의 성적은 그
냥 '우수한 편' '중간 정도'식으로 넘어갔었다.기자는 작고한 이낙선(상
공부장관 역임)이 남긴 메모와 자료들을 1991년에 열람하다가 그가 육군
소령으로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로 있을 때인 1962년에 모아 두
었던 '박정희 파일'중에서 사범학교 성적표를 발견하였다. 박정희는 입
학시험에서는 1백명중 51등으로 합격했으나 1학년 석차는 97명 중 60등
으로 내려갔다. 2학년 때는 83명중 47등으로 약간 올라갔다가 3학년 때
는 74명중 67등, 4학년 때는 73명중 73등, 5학년 때는 70명중 69등을 했
음이 밝혀졌다. 이 성적표가 그의 시대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도 '꼴찌
출신 대통령'이란 구설수를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박정희의 행동 평가도 나빴다. 품행을 의미하는 '조행'평가는 5년간
'양, 양, 양, 가, 양'이었다. 2학년 담임은 그를 '음울하고 빈곤한 듯함'
이라 적었다. 3학년 때는 '빈곤, 활발하지 않음, 다소 불성실'이라 되어
있고 4학년 때는 '불활발, 불평 있고, 불성실'이라고 적혀 있다. 지조
는 '견실', 습관은 '과언', 사상은 '온정', 학습태도는 '보통'으로 평가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장기결석이다. 2학년 때 10일, 3학년 때 41일,
4학년 때 48일, 5학년 때 41일이다. 기숙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고향에
가서 돈이 마련될 때까지 눌러 앉았기 때문이다.

'취미'란에는 '검도'라고 되어 있다. 이밖에도 박정희는 사격, 나팔,
육상에 뛰어났다. 학업에서는 꼴찌였지만 교련 시간에는 소대장이었다.

군사 및 체육과목에서 활발했다는 것은 그의 신체발육상태가 많이 향상
된 것을 반영한다. 5학년 때 그는 키가 1백59.2㎝에 몸무게는 59.5㎏,가
슴둘레 88㎝로서 '갑'의 평가를 받았다. 학과 중에서 그래도 성적이 괜
찮은 과목은 역사, 지리, 조선어였다. 이 '박정희 파일'에는 동기생(대
구사범4회)인 석광수(작고·국제신문 상무 역임)가 이낙선 소령에게 보
낸 편지가 철해져 있었다. 학창시절의 박정희를 평한 편지였다.

'말이 없고 항상 성난 사람처럼 웃음을 모르고 사색하는 듯한 태도가
인상 깊었다. 동기생 중 누구와 친하게 지냈는지조차 알 수 없다. 5학년
때 검도를 시작하였으므로 크게 기술이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권투는
기숙사에서 그저 연습을 했을 정도이지 도장에는 나가지 않았다. 군악대
에 들어가서 나팔수가 되었다. 축구도 잘했고 주로 자신의 심신 연마에
노력했다. 성적에는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으나 (머리는)우수한 편이었
고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동기생 조증출(문화방송 사장 역임)이 써보낸 인물평도 있었다.

'대체로 내성적인 편이었고 항상 무엇인가를 구상하고 있는 듯하였으
나 외표하지 않은 관계로 그의 진정한 위인됨을 파악한 학우가 희소하였
다. 다른 학우들은 장차의 이상 및 포부에 대하여 종종 피력하였으나 그
는 일절 침묵을 지켜왔고 교우의 범위도 그다지 넓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검도에는 전교에서 손꼽히는 용자로서 방과후에는 죽검을 들고 연습을
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에 학우들과 장난칠 때도 검도
하는 흉내를 내어 머리를 치곤 했다. 나팔의 제1인자로서 큰 버드나무
아래서 하급생들을 데리고 나팔 연습하는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기계체
조도 잘했다. 4, 5학년 여름휴가 때는 대구80연대에 들어가서 군사훈련
을 받았는데 박정희는 교련에 매우 취미를 가진 것으로 기억난다. 시범
때 그가 자주 조교로 뽑혀나왔다. 특히 총검술은 직업군인을 능가할 정
도로 우수하였다.'.

조증출은 이 편지에서 당시 대구사범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일본정신이 투철한 교육자들만 모아놓았기 때문에 교육이념이 천황
절대 숭배로 출발하여 신격화로 끝나는 교육이었다. 그럴수록 학생들 사
이에서는 민족적 의분심이 불타올라 소위 '무저항적 반항'을 일삼았다.
소설을 읽을 때도 일본인의 작품은 의식적으로 읽지 않고서 세계문학전
집을 읽었다. 기숙사에서도 탄압에 굴하지 않고 조선, 동아일보를 구독
하였고 '개벽'같은 잡지도 읽었다. 특히 신문연재 소설 중에서는 '상록
수'가 기억에 남는다.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진 학생들도 있었으나 대개가 민족운동을 전개하
는 한 방편이었다. 1학년에 기숙사에 입사하면 선배들이 민족의식을 고
취시켜주었다. 선배들은 우리에게 기숙사 안에서는 게다를 신지 못하게
하였다. 국어담당이신 김영기 선생이 국어 시간에 우리 국사이야기를 해
주신 것이 많은 감명을 주었다. 박정희는 특히 국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
었던 것이 기억난다. 기숙사 생활은 대체로 유쾌하고 유익하였다. 박정
희의 인품은 이 사생활을 통해서 배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
체생활을 5년간 해왔기 때문에 공덕심과 희생적 봉사정신을 도야하게 되
었고 소아를 대의적입장에서 버릴 수 있는 정신적 소지를 함양하였다.'.

박정희는 학업에서는 바닥을 기고 기숙사비도 내지 못해서 고향으로
내려가 장기간 결석을 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군사훈련
과 체육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황민화를 목
적으로 한 학과교육을 충실히 하여 모범생이 되는 길은 포기하고 국가주
의를 추구하는 군사교육에는 열심이었던 것이 박정희였다. 박정희의 이
런 선별적수용이 '나는 민족혼을 너희들에게 팔지는 않겠다. 그 대신 군
사문화의 실질은 적극적으로 배우겠다'는 계산에 의한 것이라면 그의 꼴
찌는 '이유 있는 꼴찌'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1932년 4월8일 대구사범 대강당에서 열린 4회 입학식에서 박정희도
다른 학생들처럼 히라야마 교장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히라
야마 교장은 학생들을 향해서는 일본말로 연설을 한 뒤에 학부형들을 향
해서는 유창한 우리 말로 인사를 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대구사범 4회
입학생으로서 교정에 첫 발을 들여놓았을 때 분위기는 무거웠다. 3년 선
배인 심상과 1기 학생들 중 27명이 사회주의자 현준혁 교사가 조직한 독
서회(사회과학연구회)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퇴학을 당한 직후였기때
문이다. 1기로 입학한 한국인 학생은 93명중 86명인데 졸업자는 55명이
었다. 탈락자 31명은 거의가 항일운동에 관계했다가 퇴학을 당한 것이었
다. 해방 뒤 김일성의 지시로 암살되는 공산주의자 현준혁이 대구사범의
교사로 부임한 것은 1929년이었다. 평남 개천 사람인 그는 경성제대 철
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대구에 첫 직장을 구해서 온 것이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