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이순신과의 만남 ##.
1970년4월26일에 박대통령이 김종신공보비서관에게 써준 '나의 소년
시절'에는 군인 혁명가로서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생각이 싹트기 시작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원은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동학에 입교한 후 서기일을
맡아 보기도 했다. 1907년 도일하여 메이지학원에서 수학하며 '소년'을
발표한 그는 1917년 장편소설'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해 주목받기 시작한다.
동아일보에 '이순신'을 연재한 이듬해 8월 그는 조선일보사로 옮겨와
부사장으로 근무하면서 본지에 소설'유정'을 연재했다. 사진은 1929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소년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음.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때 춘원이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장군을 숭배하게 되고 6학년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
레옹을 숭배하였음'.
박정희는 소년시절 병정놀이를 즐겨 했다. 뒷동산에 올라 나무칼을
휘두르는가 하면 아이들을 불러모아 대장노릇을 했다. 어머니 백남의는
"아무래도 저 아이는 군인이 되겠군"이라고 말하곤 했다고한다. 어린 시
절의 병정놀이는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사물을 힘과 승패의 관
점에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숭배하게 되는 이순신과 나
폴레옹도 어린 시절에 병정놀이를 즐겼다. 박정희로 하여금 군인의 길에
흥미를 갖도록 한 계기는 한반도로 진출한 일본의 군사문화였고,우리 언
론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민족정신 계몽운동이었다. 박정희 소년은 구미
보통학교에 들어가 글을 배운 뒤에는 사회 속에 노출되어 역사의 조류를
타고 있었다.
춘원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소설 '이순신'을 연재한 것은 1931년5월30
일부터 이듬해 4월2일까지였다.박정희는 1931년엔 6학년이었으므로 수기
에서 5학년이라고 한 것은 착각이다. 보통학교 시절에 '이순신'을 읽었
다면 책이 아니라 신문을 통해서 연재소설을 읽었다는 얘기가 된다. 박
정희의 셋째 형 상희가 구미읍에서 조선일보 선산지국을 운영하면서 조
선일보, 동아일보를 같이 팔고 있을 때였다. 아마도 정희 소년은 형으로
부터 신문을 얻어서 읽었을 것이다.
일제시대 민족문화운동의 중심이었던 조선, 동아 두 신문은 1920년대
말부터 한자보급운동과 우리 역사보존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조선일보
는 1929년부터 '귀향남녀학생 문자보급 운동'을 해마다 실시하고 있었
다. 동아일보는 전국에서 거둔 성금으로 1932년 6월에 현충사를 충남 아
산에 중건했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이광수가 '이순신'을 연재
한 것은 이런 운동의 일환으로서였다. 이광수는 연재를 시작하면서 쓴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이순신을 철갑선의 발명자로 숭상하는 것도 아니요, 임란의 전
공자로 숭앙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위대한 공적이 아닌 것은 아니
겠지마는, 내가 진실로 일생에 이순신을 숭앙하는 것은 그의 자기희생적,
초훼예적, 그리고 끝없는 충의(애국심)인 것입니다. 군소배들이 자기를
모함하거나 말거나, 일에 성산이 있거나 말거나, 자기의 의무라고 믿는
바를 위하여 국궁진췌하여 마침내 죽는 순간까지 쉬지 아니하고 변치 아
니한 그 충의, 그 인격을 숭앙하는 것입니다'.그는 1931년7월호 '삼천리'
잡지에서는 이렇게 썼다.
'나는 조선 사람 중에 두 사람을 숭배합니다. 하나는 옛 사람으로 이
순신이요, 하나는 이제 사람으로 안도산입니다. (중략). 글이나 그림으
로 저 생긴 것 이상으로는 못쓸 법입니다. 내가 이순신을 그리거나 안창
호를 그리거나,결국 내 인격 정도 이상은 넘지 못할것을 내가 압니다.그
러니 나는 더 이상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다만 내 힘을 다하여서 내 애인
을 그릴 뿐입니다'.
이광수는 1932년4월2일에 이 연재소설 '이순신'을 이렇게 끝맺었다.
'그때에 적을 보면 달아나거나 적에게 항복한 무리들이 다 정권을 잡
아 삼백년 호화로운 꿈을 꾸는 동안에 조선의 산에는 나무 한 포기 조차
없어지고 강에는 물이 마르고 백성들은 어리석고 가난해졌다. 그가 돌아
간지 334년4월2일에 조선 오백년에 처음이요, 나중인 큰 사람, 이순신의
슬픈일생을 그리는 붓을 놓는다. (나는 충무공이란 말을 싫어한다. 그것
은 왕과 그 밑의 썩은 무리들이 준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소년이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
다. '이순신'은 소년기에 자주 접하게 되는 권선징악의 단순명쾌한 줄거
리를 가진 위인전이 아니기 때문이다.이광수의 '이순신'은 그가 말한 대
로 '슬픈 이야기'이다. 어리석은 왕(선조)과 당파싸움에 눈이 먼 선비들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순신의 처절한 최후. 가슴에 총탄을 맞은 이순신
이 조카에게 하는 말-- "나를 혼자 두고 어서 나아가 싸워라. 적을 하나
도 놓아보내지 말아라".전선의 사령관을 모함하여 고문하고 파직하는 지
배층, 백의종군 길에서 접한 어머니의 죽음,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떠나는 길. 이광수는 '난중일기'를 인용하여 적었다.
'십육일. 영구를 상여에 올려 본가로 돌아왔다. 고향을 바라보니 아
프고 슬픔을 어찌 다 말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니 비가 퍼붓는
다. 남쪽으로 갈 기약이 박두하니 우짖고 우짖으며 오직 어서 죽기만 기
다릴 뿐이다. 십칠일. 금부서리 이수영이 공주로부터 와서 길을 재촉하
였다. 십팔일. 종일 비오다. 마음이 심히 불편하다. 다만 빈소에 곡하고
물러나왔을 뿐이다.'.
이광수가 이 소설에서 진정으로 그리고싶어 했던 것은 '왜적과 용감
하게 싸우는 이순신'이 아니라 '문약하고 시기심이 많은 선비정치인들에
의하여 당하고마는 비극적 군인'이었다. 박정희는 나중에 이순신과 조선
조 지배층에 대해서 이광수와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된다. 1960년대에 현
충사를 성역화할때 그는 자신의 조국근대화 정책에 반대하는 지식인들과
직업정치인들을 이순신을 모함했던 조선조의 선비들과 동일시했던 것이
다.박정희는 1962년에 쓴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충무공 정신은 화랑도의 이조적 중흥이다. 신라 때부터 호국, 민
족정신으로 꿋꿋하게 전승되어 온 화랑도가 한 때 문약에 빠져 시들어오
다가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그 정신이 다시 한번 꽃핀 것이다.화랑국선을
이조에서 찾는다면 이충무공이다'.
박정희는 또 이순신의 구국정신과 신라의 무사도를 '우리 국민정신
의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가근대화의 이념적 뿌리를 우
리 민족사의 이런 상무 정신과 실학의 실사구시 정신에서 구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이런 사고의 어렴풋한 첫 실마리를 박정희는 '이순신'을 읽으
면서 얻었을 것이다.
이순신을 우리 역사속에서 재발견한 사람은 실학의 후원자 정조였
다. 정조는 정부문서간행소에 해당하는 교서관에 전담 부서를 두어 이순
신의 유고들을 모아 14권8책의 '이충무공전서'를 간행시켰다 . 충무공을
대중화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광수의 '이순신'은 '이충
무공전서'에 근거하고 있다. 정조와 이광수를 이어받아 이순신을 '민족
의 태양'으로 추켜올린 것이 박정희였다. 김유신(화랑국선)-이순신-정조-
박정희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정신사의 한 맥은 상무-실용-자주정신을 대
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사대적 명분론의 문민정치 전통이 도도하게
흐르는 가운데 징검다리처럼 단속적으로 명맥을 유지해가고있는 것이다.
이광수의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많이 참고로 하는 바람에 원균을
지나치게 비하하였다. 충무공을 비극적인 영웅으로 만드는 데 원균은 도
구로 이용되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