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의 하느님 ##.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자신이 어릴 때 교회에 다녔다는 사
실을 발설한 적이 있다. 서울 강남지구에 있는 광림교회 김선도담임목사
에 따르면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린 기독교 교육자 대회에 참석한 박의장
은 축사를 통해서 "나도 주일학교에 다녔는데 요사이는 다니지 않고 있
다. 여러분들이 교육을 잘해주어서 나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해달
라"고 당부하더란 것이다.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가 쓰던 것을 물려받은 이 책상은 가로 88, 세로
53cm의 크기로 현재 생가에 보존되어 있다. 박정희는 식구들이 잠들면
일어나 호롱불 아래서 책을 읽곤 했다고 한다. 빼 본 서람에는 잉크
얼룩이 남아 있었다.
1962년6월초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최고위원들과 함께 김포로 가서
모심기를 했다. 논두렁에 앉아 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말했다.
"의장님이 오시는 데 맡추었는지 마침 비가 내렸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한 기자가 그 말을 받았다.
"의장께서도 이번 기회에 종교를 하나 선택하시지요.".
박의장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원래가 유신론자입니다. 하늘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내려주시고 게으르게 앉아서 놀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안주
시는 것입니다.".
김선도 목사는 소령 시절에 육군사관학교의 군종실장이었다. 1971년
육사졸업식장에서 김목사는 축도를 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우리 사관생도들이 이제 할퀴고 찢긴
이 조국을 지키려 나갑니다. 이들을 보호해주시고 국군통수권자이신 대
통령이 외롭지 않도록 살펴주십시오. 솔로몬의 지혜와 다윗의 용기를
대통령께 부어주십시오.".
축도를 끝내고 김 목사가 대통령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했더니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졸업식이 다 끝난 뒤
에 인사를 했다. 대통령은 김 목사의 손을 잡더니 "좋은 기도를 해주어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선도 목사는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기에 주
일학교에 다닌것이 그분의 인생관과 신관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
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정희의 하느님은 공짜가 없는 하느님이고 사랑만의 하느님도 아니
다. 1976년 1월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한 자리에서 그는 보고를 들은
뒤에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소감을 솔직하고 담
담하게 밝히는 강평을 했다. 부산의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아 낸 녹음
테이프에서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언젠가 그들(편집자 주· 북한공산당)이 무력으로 접어들 때는 결
판을 내야 합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나 불경책에서는 살생을 싫어하지
만 어떤 불법적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할 때는 그것을 쳐부수는
것을 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 내 볼을 때리면
이쪽까지 내주고는 때려라고 하면서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선량
한 양떼를 잡아 먹으러 들어가는 이리떼는 이것을 뚜드려 잡아 죽이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과 정의라는 기독교의 두 사상적 기둥 중 어느 한 편만 강
조하지 않고 균형을 취하고 있다. 대통령 시절 그는 사랑이란 보편적
가치와 더불어 정의라는 특수한 가치를 조화시킨, 신라의 호국불교와
닮은 호국기독교를 선호하였다. 박대통령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졌
다고 본 한경직, 김준곤, 김장환목사를 가까이 했다.
신라의 원광법사는 불교의 자비정신에 위배해가면서까지, 화랑도의
신조인 세속오계를 만들면서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살생유택)는 항목을 끼워넣었다. 원광은 '나는 중이기 이전에 신라 사
람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에 일부 기독교회가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자 박정희는 서구적인 가치관으로 추종하는 풍조를 개탄
하면서 '국적 있는 종교'로서의 신라 불교 정신을 여러 번 강조했다.이
때문에 박정희를 불교신도로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1974년12월11일 박
정희는 청와대 참모들 앞에서 천주교계에 대해서 불평을 털어놓은 뒤에
이런 농담을 했다.
"교회에서 정치에 간섭하면 우리도 교회에 간섭할까?".
이 무렵 작성된 박정희 대통령의 공무원인사기록카드에는 종교란에
아무것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무'라고 적지 않은 것은 특정 종교의
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가 나름대로 개념정리해둔 절대자의 존재는 부인
하지 않으려는 심리를 엿보게 한다. 여러 문화요소의 주체적인 종합을
강조해온 박정희는 이념이나 신까지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통합
하여 자기 나름의 것을 만들었던 모양이다.
박정희는 1975년 3월10일자 일기를 이렇게 끝맺고 있다.
'오 신이여! 북녘 땅에 도사리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공산당들에게
제 정신으로 돌아가도록 일깨워 주시고 깨닫게 해 주소서.'.
여기서도 문장은 기독교식 기도문인데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신'
이라적고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 샤머니즘의 '하느님'도 아닌 자신
의 주관에 따라 객관화시킨 절대자를 의미하려고 하는 의지를 엿볼 수
가 있다.
박정희가 다녔던 상모교회의 건물은 해방 이후 다시 지어졌으나 6·25
때 상당부분이 파손된 채 1960년대를 맞았다. 1966년 가을에 생가와 선
산을 둘러보던 박정희 대통령은 주일학교 시절의 친구 한성도(82세)장
로를 만나 교회재건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게 된다. 소년기의 박정희
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몇 가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기도
의 힘, 천당과 지옥, 영생불멸, 죄의식, 신 앞에서의 인간평등. 동시에
교회는 이 시골 소년으로 하여금 서구문명의 중요한 부분을 들여다보게
하는 최초의 좁디좁은 창역할을 했을 것이다.
박성빈의 둘째 아들 박무희의 장남 박재석은 1931년에 6학년이던 박
정희와는 1년간 구미보통학교를 함께 다녔다. 박정희를 '아제(아저씨)'
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던 박재석은 아홉살이 되어 바로 2학년에 입
학했던 것이다. 그는 쌀밥이 먹고 싶어지면 아침 일찍 박정희가 일어나
밥을 먹던 사랑방으로 슬금 슬금 들어갔다.
어느 날 검은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차려 입고 밥을 먹고 있던 박정
희는 자신의 숟가락질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박재석에게 갑자기 심술이
났던 모양이다. 아침 공부하다 놓아 둔 펜을 집어 든 박정희는 "이놈아,
공부좀 열심히 해라"하면서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펜을 박재석의 오
른 볼 위에 죽 그어버렸다.
서럽고 아파 울음을 터뜨리는 박재석. 곁에 앉았던 할머니 백남의가
손자를 다독거리면서 박정희에게 "아이고 야가 와이라노? 그라다 다칠
라"하고 점잖게 나무랐다. 박정희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밥을 다 먹은
다음 책보를 챙겼다. 박재석도 달려나가 자신의 책보를 챙겨 사립문 밖
으로 나왔다. 그 무렵 상모동엔 구미 보통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이 몇
명 더 있었다. 저학년인 이 어린이들은 책보를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로 비스듬히 감아 묶었다. 고학년이 된 박정희는 책보를 오른쪽 어
깨에만 걸친 채 학교로 출발한다. 박재석은 '학교 가는 길'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이 어린 우리들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장난질 치며 걸어갔지
요. 그 분은 언제나 말이 없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은 분명했지
만 우리야 어려서 그게 무엇인지 잘 몰랐지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에
박혀서 공부만 하고 학교를 오갈 때는 생각에 잠겨 묵묵히 걸어가던 모
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어린 나이에도 참--생각이 많았
던 것 같습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