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 주일학교에 나가다 ##.
박정희가 3학년이었던 1928년, 구미면에서 유일한 소학교였던 구미
공립보통학교는 연례적인 봄 운동회를 개최했다. 이 운동회에서 박정
희의 동기생인 이준상은 달리기를 하다 넘어져 무르팍을 다친다. 이준
상은 구미면 중앙통에서 5대째 한약방 '영수약국을 경영해오던 이영수
의 셋째 부인의 장남이었다. 지금 경북 구미시에서 살고 있는 이준상
의 막내동생 이일상(70)의 증언에 따르면 한약방을 하던 그의 부친은
민간요법을 쓴다며 무리하게 아들의 다리를 치료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추석때 선산에 성묘한 뒤 이 교회를 둘러보고는
"나도 이 교회에 자주 다녔는데..."라고 말했다. 1950년에 지은 사진
속의 교회는 6.25동란때 인민군들이 주둔하면서 상당히 파손되어 있었다.
건물을 둘러 본 박 대통령은 "건물이 많이 상했네"라고 말하며 이듬해
1백여만원의 증축지원금을 보내 주었다.
"아버지(이영수)께서는 상처에 뜨겁게 끓인 수은을 부으면 독한
기운을 빨아낸다는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
는 일이었지만 어른은 그 날 저녁에 형(준상)의 무르팍에 뜨거운 수은
을 세번이나 들이부었지요. 아파 죽겠다는 형님의 팔다리를 여러 사람
들이 잡고 '수은 찜질'을 했는데 그만 무릎연골이 녹아 내린 겁니다.".
이준상은 영원히 오른쪽 무릎을 굽히지 못하는 장애자가 되었다.그
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학교를 계속 다녔다. 누구나 이준상에게 손가
락질을 해댈 수 있었지만 학교에서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
다. 그의 곁엔 항상 '대추 방망이'라는 별명을 가진 2조(반) 급장 박
정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이준상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이준상의 집은 학교에서 5분여 거리였다. 박정희가 도시락을
싸오지 않은 날이면 이준상은 정희를 자기집으로 데려가 함께 밥을 먹
여주곤 했다. 신기도(67·구미시 문화원 부원장)는 "어린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너, 선산군수 아들 할래, 아니면 영수 약국집 아들 할래'라
고 물을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박정희의 동기생 박승룡(81)은 사각형 양철 도시락인 '벤또'를 싸
갔던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점심시간에 '벤또'를 열면 박정희의 것에는 언제나 '서숙쌀'이라
고 불리던 좁쌀에 보리가 절반쯤 섞인 밥이 담겨 있었지요. 보통 아이
들은 보리밥에 쌀이 좀 섞이기도 했는데 박정희는 좁쌀이 많아 단번에
가난한 집안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이런 도시락도 싸오지 못
한 날이 많았어요. 그럴 때면 준상이 집으로 가서 밥을 얻어먹고 오곤
했습니다. 두 소년이 친하다는 사실은 동기생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요.".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기전까지도 고향을 찾으면 이준상과 자주 어
울렸다. 그 때마다 곁에 있었던 이준상의 동생 이일상은 두 사람을 이
렇게 비교했다.
"우리 형님은 육체적으로 약했지만 돈은 무척 많았고 어려운 사람
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지요. 반면 박정희 형님은 남에게 생전
지려고 하지 않았으나 돈이 없었지요. 두 소년은 그런 면에서 공생하
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참 순수했
어요.남이 어려움에 처하면 보고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니까요.".
이준상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가 작고한 이후 가세가 급속히 기울
어져갔다. 5·16 혁명 이후 이준상은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1963년
10월 15일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박정희는 경주에
있다가 생가를 찾아 구미역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를 대하자 박정희는
제일 먼저 "상준이 어디 있노. 상준이"하며 그를 찾았다. 박정희 최고
회의 의장은 허름한 차림의 이상준을 찾아내 자신의 지프에 태운뒤 생
가로 이동했다.이 사건 이후 구미에서는 가난한 장애자 이준상을 아무
도 업신여기지 못했다. 1972년 이준상은 어릴 때 다친 다리를 또 다시
다쳐서 골반까지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다가 이듬해 53세의 나이로 사
망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그의 병원치료비를 댔다.
박정희가 구미 보통학교를 다닐 무렵 생가에서 남쪽으로 약 2백m
떨어진 곳에 '상모교회'가 있었다. 1901년 3월13일에 선교사 언더우드
의 제자가 세운 이 교회는 선산군에서 두번째로 선 기독교 교회였다.
당시는 개척교회를 세우려던 사람들과 토착 양반들과의 대립이 심
했다. 전통을 상징하는 유교와 근대를 상징하는 기독교 사이에 문명의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박정희 소년이 6년동안 이 교회를
다녔다는 사실은 이번 취재에서 처음 밝혀진 사실이다. 정기현(67) 장
로는 박정희가 교회를 다녔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8촌 조부되는 정인백씨가 이 교회를 세우셨는데 뒷날 박정희 대
통령이 소년시절에 교회에 자주 나왔다고 하셨지요. 박대통령과 한 살
아래였던 삼촌 정규선(1991년 사망)씨도 상모교회 옆에 사셨는데 대통
령이 우리 교회에 다녔다고 가끔 말했습니다.".
박정희와 동갑내기인 한성도(82)장로는 현재 생존해 있는, 박정희
의 유일한 교회친구다. 그는 박정희가 꾸준히 교회를 다녔다고 말했다.
"박정희와 저는 처음에 유년 주일학교에 나왔습니다. 구미 보통학
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에도 나가게 되었습니다. 일요일 오전9시
부터 10시까지 하는 주일학교에 열심이었습니다. 소년들이 막 코흘리
개의 때를 벗을 무렵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한복차림으로 교회에 모
여들던 시절입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이 기도하는 법이었지요".
고사리 손을 모으고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할 수도 있는, 서구 문
명의 정점에 선 신에 대해 박정희소년은 외경심을 갖고 기도했을 것이
다. 주일학교에서 특별히 한글을 가르치거나 학교 과정을 가르친 적은
없다고 한다.
"주로 성경을 읽고 찬송하는 것이었지요. 학교 교육처럼 가르치고
하는 것은 해방 이후에 많았고, 당시는 주일학교 교사마다 달랐지만
거의 그런 교육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에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고 한
다. "예수님 생일날이면 교회에서는 새벽기도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
니며 찬송도 불렀지요. 물론 박정희도 저와 함께 성가대를 따라다녔던
게 기억납니다. 워낙 말이 없고 싱긋 웃기만 했지요. 크리스마스 때는
선물로 과자나 빵을 주었어요.".
박정희가 다닌 주일학교에는 어린이가 약 20여명이었다고 한다. 나
이가 보통학교 1∼2학년쯤 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박정희의 가족들 중 교회에 나온 것은 그가 유일했지요. 꼬박꼬
박 잘 다니던 박정희는 대구 사범에 진학하면서부터 나오지 않았어요."
당시 교회건물은 기와집 네 칸을 연결해 만든 예배당이었다. 길
옆으로 작은 초가 한 채를 지어 목회자들의 사무실로 썼고 마당 한 쪽
에는 종탑이 세워져 있었다. 박정희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 자랐던것이
다.새벽마다 뎅그랑 뎅그랑 울리는 종소리는 시계가 없던 마을에 좋은
시간 표준이 되었을 것 같은데 박정희의 이야기에는 경부선 기차 소리
만 등장한다.
그 무렵 상모리에서는 박정희 생가 부근의 선산 김씨 집성촌락쪽
으로 양반들이 모여 살고 상모교회가 들어선 곳으로는 머리도 짧게 깎
은 비교적 개화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는 양반촌
이 월등히 나았다.
이들은 교회가 '우상숭배'라며 제사를 금기시하는 데 불만이 많아
자녀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극구 반대하곤 했다. 그럼에도 박정희만
은 어른들의 반대에 봉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교회를 드나들 수 있었
다. 어머니 백남의의 배려나 권유에서 가능했던 것이라 보여진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