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추방망이' 급장 ##.
박정희가 다닌 구미공립보통학교는 1919년에 설립되어 이듬해인 1920
년에 개교했다. 처음 3년간은 4년제로 운영하면서 학무관들이 구미면 내
의 가정을 방문해 가며 아이들의 취학을 유도했다. 박정희의 셋째 형 상
희도 이 무렵 학교를 다니게 된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의 수기 '나의
소년시절'에서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어머니께서는 상희 형을 학교에 보
내셨다'고 적고 있다. 어머니 백남의가 상희, 정희 두 아들을 교육시키
는데 있어서는 아버지보다도 더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구미공
립보통학교가 정식으로 6년제 학생들을 배출한 것은 1925년도부터였다.
사진 가운데 앉은 이가 담임 김득명 선생이고 바로 왼쪽이 장월상. 박정희는
뒤에서 두번재 줄 오른쪽 끝에 서 있다. 맨 뒷줄 왼쪽 그끝이 박승용, 그
옆이 이진수, 다섯번째로 선 키 큰 어린이가 권해도로 그는 박정희보다
나이가 많았다. 박정희와 절친했던 이준상은 뒷줄 오른쪽 끝에서 네번째이다.
이 당시 15세였던 박정희는 1백 35.8cm의키에 몸무게가 30kg이었다. 배경
건물은 그 무렵의 학교 본관으로 6.25당시 전소되어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박정희는 구미공립보통학교에 1926년4월1일 입학하여 1932년3월1일자
로 졸업했다. 반을 라 불렀는데 졸업 때 박정희는 2조였다. 2학년 때까
지는 급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는 최우등생을 자동적
으로 급장으로 뽑아 박정희가 졸업할 때까지 급장을 했다. '이낙선비망
록'(1962년 작성)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성적은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하며 암기력이 좋아 산수, 역사, 지리
등은 언제나 만점. 조리있는 발표력. 전반적으로 사고가 예민하였으며
학습시간에는 남보다 먼저 손들고 침착하게 발표. 학급중 연소하였으나
(연령차가 많았고, 박보다도 5, 6세 위도 있었음) 매학년 1등생. 급장으
로서 통솔력이 탁월하여 자습시간 등에는 학우들을 지도하였으며 체육시
간에 선생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갖추어 기다리도록 지도를 잘함. 학급
운영을 선도적으로 척척 해내다. 아동으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과묵,냉철,
사색적 성격. 학우간 융화는 보통이나 모두 두려워 함. 평소 대담한 성
격으로 3학년 학예회 때 갓쓰고 긴 담뱃대 물고 점잖을 빼는 노인역을
위엄있게 썩 잘해 내어 모두 놀라고 만장대소. 의복은 한복. 검은 두루
마기에 짚신을 신고 다니다. 가정은 곤궁했으나 월사금의 체납은 없었
다.실습 등을 잘했다. 혼자 목검놀이를 즐겼다. 어머니는, 저 애가 크면
군인이 될 거라고 했다'.
작고한 동기생 장월상은 생전에 이런 증언을 남겼다.
"박정희는 어릴 때 몸집이 비록 작았지만 야무진 데가 있어 '대추 방
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체구에 비해 담력이 세고 머리가
비상하여 암기력이 뛰어났습니다. 3학년때 학예 발표회 연극에서는 노인
역을 맡아 학부형들과 선생님들을 놀라게 해 준 적도 있었습니다.".
동창생 이진수(82, 경북 구미시 송정동 향장)는 교실에서 선생님이
'누가 나와서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보라'고 하면 박정희가 자진해서 나
와 옛날 이야기를 잘 했다고 말한다.
"박정희가 이야기하면 아이들이 다 재미있어 했어요. 꼭 나이 많은 어
른들이 해 주시는 것 같았으니까요. 이렇게 합니다. '옛날에 말이지, 서
당훈장이 꿀을 감춰두고 아이들에게는 이걸 먹으면 죽는다고 했거든. 그
라고는 혼자서 조금씩 먹는 기라. 하루는 훈장이 밖에 나갔다 오는 사이
에 아이들이 꿀단지를 꺼내 실컷 퍼 묵은 기라. 얼마나 맛있겠노. 손가
락으로 꿀을 찍어 쏙쏙 빨아묵고 하다가 보이 다 묵어뿌릿는 기라. 인자
큰일이 날낀데 우야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구수할 수가 없는 겁
니다." 이진수는 박정희가 급장을 '야무지게' 했다고 기억한다.
"아침 조례를 할 때면 급장인 박정희가 일어나 '기오츠케(차렷)', '센
세이니 게이레이(선생님께 경례)'라고 구령을 붙이지요. 구령만은 일본
말을 썼지만 그 밖에는 우리말을 썼습니다. 공부도 잘했지만 예쁘게 생
겨 선생님들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았지요.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면 대
답을 가장 많이 하는 친구가 박정희였습니다.".
같은 반에서 동기생 박승룡(83)도 박정희 소년을 비슷하게 회고한다.
"돌이켜 보면 박정희는 귀엽고 예쁘게 생긴 친구였지요. 그런데도 학
교다닐 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성품이 몹시 독한 데가 있었기 때
문이지요. 별명이 '악바리''대추 방망이'였지만 함부로 그렇게 부르지도
못했어요. 공부도 잘했고 해서 아이들이 그를 두려워했던 겁니다. 일본
인 교사들도 그를 귀여워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박정희가 급장을 지냈던
3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급우들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
이들이 드물 정도였습니다. 동급생들보다 키가 작았던 박정희는 겁도 없
이말 안듣는 아이들이 있으면 체구나 나이가 위인데도 뺨을 후려 갈겼어
요. 반에서 가장 키가 컸던 권해도는 박정희보다 한 뼘 이상 키 차이가
났고 장가까지들었는데 교실에서 뺨을 맞아야 했습니다. 고개를 쳐 들고
하늘을 보듯이 권군의 뺨을 때리던 박정희의 모습을 생각하니 지금은 웃
음이 나와요. 늘 냉엄한 표정인 정희에 대해서 아이들은 가까이하기를
어려워했어요.".
박정희는 자신의 선천적 조건인 가난과 작은 체구의 문제를 극복하고
38명의 급우들을 통솔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발휘한 것 같다. 공부를 열
심히 해서 우등생이 되고 교사로부터 인정을 받아 낸 것은 노력을 통해
후천적 조건을 유리하게 만든 경우이다. 동료 급우들에게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은 권위를 유지하고 빈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자세였을지
도 모른다. 그는 권력의 속성인 폭력을 동원해 상대를 굴복시키기도 했
다.
정치에 사용되는 힘은 강제력(전체주의), 권위력(권위주의), 교환력
(민주주의)으로 나눠진다. 박정희의 급장시절을 살펴보면 권위력과 강제
력을 동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으나 교환력을 사용한 흔적도 있다. 대
통령 시절의 수기 '나의 소년 시절'에는 '급장 시절의 추억'이란 제목을
달고 쓴 글이 나온다.
'힘이 세고 말을 잘 들어 먹지 않는 급우가 한 놈 있었음. 그러나 이
자가 수학은 전연 못하고 늘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는 것을 보고 내 말을
잘 듣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휴식시간에 산술문제를 가르쳐 주고 숙
제못 해온 것을 휴식 시간에 몇 번 가르쳐 주었더니 그 다음부터는 내
말이라면 무조건 굴복하던 생각이 남'.
대한민국 국민들이 기억하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분위기와 구미 보
통학교 동창생들이 기억하는 급장 시절 박정희의 분위기는 묘하게 겹치
고 있다. 박정희 급장의 통솔방식이 대통령 박정희의 통치술로 발전한
것이다.
1926년에 발행된 '선산군지'에 따르면 1918년 현재 9개 면을 이루고
있던 선산군 전체인구는 6만6천1백41명이다 . 그 중 내지인(일본인)은
4백8명, 지나인(중국인)은 7명. 박정희가 살았던 구미면(균미면)은 1천
6백50호에 9천1백52명이었다. 이 무렵 구미면의 의료수준을 짐작하게 하
는 일화가 있다. 박정희가 유아기를 지날 무렵 둘째 누나 박재희는 네
살아래인 동생을 업고 다니다가 넘어져 오른 쪽 종아리를 심하게 다친
일이 있었다. 박재희는 훗날 며느리 선우민숙(39)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
려주었다.
"부모님들이 나를 데리고는 장에 나가 길바닥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
람들을 붙잡고 하소연했었단다. '우리 딸이 이렇게 다쳐 잘 안 낫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지 좀 가르쳐 달라'고 말이지. 어떤 사람이 가르쳐 주
기를 '담배 잎을 구해 상처에 덮은 다음 태우면 담배 연기가 독을 빨아
낸다'는 거야. 부모님들이 집에 오셔서 그 말대로 하셨는데 곪은 데서
쌀알 같은 것들이 나오더니 이렇게 나았단다.".
박재희(1996년에 83세로 사망)는 손주들이 다칠 때마다 이 경험담을
들려 주면서 담배연기를 상처에 갖다 대곤 했다고 한다.'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