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 구상의 진혼축 ##
[국민으로서는 열여덟 해나 받든 지도자요/개인으로는 서른 해나
된 오랜 친구/하느님! 하찮은 저의 축원이오나/인류의 속죄양, 예수
의 이름으로 비오니/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고이 쉬게 하소서. 이 세
상에서 그가 지니고 떨쳤던/그 장한 의기와 행동력과 질박한 인간성
과/이나라 이 겨레에 그가 남긴 바/그 크고 많은 공덕의 자취를 헤아
리시고/하느님, 그지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
긋난 잘못이 있었거나/그 스스로가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
그가 앞장서 애쓰며 흘린 땀과/그가 마침내 무참히 흘린 피를 굽어보
사/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길이 살게 하소서].
친구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써내려간 구상시인의
이 진혼축은 대령에서 대통령시절까지 인간 박정희와 교우하면서 남
긴 일곱 편의 시작중 마지막 편이 되었다. 구상이 나이가 두 살 위인
박정희를 처음 만난 것은 1952년 피란지 대구에서였다. 국방부 기관
지인 진중신문 '승리일보'의 편집책임자였던 구상은 대구에 있던 육
군본부 작전국장 이용문 준장과 막역한 사이였다. 어느 날 구상이 이
준장의 사무실에 갔더니 조그맣고 새까만 대령이 한 사람 와 있었다.
호탕한 성격의 이 준장은 그 대령을 소개시켜주면서 일본말로 "이 사
람은 의리 남아야"라고 했다.
맹수처럼 무서운 눈매가 인상적인 이
대령이 박정희 작전국차장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세 사람은 자주 어
울려 다녔다. 주석에서 이 준장은 구상과 맞상대를 하고 박정희는 상
관을 의식하여 조심하는 편이었다. 영웅적인 풍모가 있는 이용문(자
민련 이건개 의원의 선친)과 내성적인 박정희는 퍽 대조적이면서도
서로가 존경하는 사이로서 보기가 좋았다. 구상은 박대령의 견식이
넓은 데 놀랐다. 전쟁중인데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은 군인이었다.그
는 '월남흥망사' 같은 역사서를 많이 읽고 있었다. 당시 장교들의 평
균적인 자질과 비교할 때 박 대령은 하나의 경이였다.
이때 이용문과 박정희는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
들을 동원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국회에서 개헌을 강행하여
직선제 대통령으로 출마하려는 데 반발하여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었
다.
쿠데타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이용문은 그 1년 뒤 비행기 추락사
고로 죽었다. 구상과 박정희의 우정은 계속되었다.
4·19혁명이 난 1960년 겨울.
[나의 변신을 곤혹의 눈으로 바라보는 현실의 주위를 피하여 사문
일초(편집자 주 시인 고은)와 작반해서 제주도로 갔다. (중략).귀
로, 대구에서 만난 장군 박정희는 이미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내가
피정의 여운으로 화제를 주락으로 몰고가도 '해치워야 해'를 주정 섞
어 연발하며 '편성숙숙야도하 효견천병옹대아'란 일본 시음을 되풀이
해 불렀다. (하략)]
그리고 5·16혁명.
[나는 5·16 아침을 어느 무희집에서 맞았다. 그녀는 아침 화장을
하면서 방송을 들으며 '이러면 세상이 어떻게 되는가요? 선생님 신상
에 행여나 해나 없을까요'라고 연거푸 물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귓
등으로 흘리며 '말 채찍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느니 새벽에
대장기를 에워싼 병사떼를 보네' 그 친구 일본 시음을 흉내내며 새벽
의 한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와 마주 앉은 것은 5월19일 저녁, 기관총을 실은 장갑차가 마
당에 놓인 어느 빈 호텔의 한 방. 그도 나도 잠자코 술잔만을 거듭
비웠다. 마침내 그가 뚱딴지 같은 소리를 꺼냈다. '미국엘 좀 안가
주시렵니까?' '내가 영어를 알아야죠?' '영어야 통역을 시키면 되죠!'
'하다못해 양식탁의 매너도 모르는 걸요!' '그럼 어떤분야라도 한 몫
져주셔야지!' '나는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두세요!' 얼핏 들으면
만담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술잔을 거듭 비웠다].
그 며칠 뒤 구상은 가톨릭이 경영하던 경향신문 도쿄 지국장을 자
청해서 국내를 떠난다.
[ 바로 내 앞방에다 사무실을 마련해 놓았는데 끝내 가시기요, 이
판국에 일본 낭자들과 재미나 볼 작정인가요? 시인이란 현실에서보
면 망종이지요. 그래서 '플라톤'도 그의 이상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
는 게 아닙니까!].
구상은 몇년 뒤 가톨릭 재단의 경영난으로 곤경에 처한 경향신문
사를 피동적으로 인수하였다가 '교회의 암흑면'을 체험하게 되고 '영
혼의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이때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도움을 제
의한다.
['그 신문사 일 어떻게 되었어요'/'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시 줄 쓰는 것밖엔 없나 봅니다'/'보고를 받고 다 알고 있어요. 교회
라는 거룩한 탈을 쓰고 그 짓들인데 그 사람들 법으로 혼들을 내 주
시죠. 그렇듯 당하고만 가만히 계실 거예요'/'그럼 어쩝니까? 예수
가 왼 뺨을 치면 오른쪽 뺨을 내대라고 가르치셨는데야!'/'그래서야
어디 세상을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까!'/'그게 바로 천주학의 어려운
점이지요!'/'천주학이라!'. 그는 그 말을 뇌까리면서 더 이상 나를
힐난하려 들지는 않았으나 자못 내가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아
마 그때 나를 현실에 이끌어들이려는 생각을 단념했을 것이다.]
1967년7월 제6대 대통령 취임경축행사에서 구상은 친구를 위하여
이런 시를 낭독한다.
[당신의 영광에는 푸르름이 있다/밤안개를 헤친 결단의 그날/이땅
에 또하나 새벽 동을 트게 하고 /우리의 가슴 속에 새 삶을 불러일으
킨/저 5월의 푸르름이 있다. 당신의 영광에는 땀이 배어 있다/바위벽
을 뚫는 광부의 이마같이/보리타작을 하는 농부의 잔등같이/아니, 앞
장서 수레채를 잡은 일꾼같이/전신의 땀이 배어 있다. (중략). 당신
의 영광에는 우리의 다짐이 있다/썩고 곪은 것은 제 살이라도 도려내
고 /눈뒤집힌 편싸움과 패가름을 막아서/꿀벌과 같은 질서와 화목을
이룰/우리와 당신의 굳은 다짐이 있다.(하략)]
구상 시인은 1970년도 봄학기부터 73년 여름학기까지 미국 하와이
대학에서 한국전승문화를 강의했다. 귀국해보니 유신체제의 심장이요
뇌수인 그의 친구 박정희는 너무 달라지고 있었다.
[그는 샤먼이 되어 있었다/그 장하던 의기가 돈키호테의 광기로
변하고/그 소박(질박)하던 성정이 방자로 바뀌어 있었다/오랜 역려에
서 돌아온 나는/권좌의 역기능으로 굳어진/그 친구를 바라보며/공동
묘지의 갈가마귀 떼처럼/활자마다 지저귀는 신문과/신의 무덤에 나아
가/가마귀 떼처럼 우짖는/군중 속에서/원가가 없어/더욱 가슴 아팠다.]
구상이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나자렛
예수'를 쓰고 있을 때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망자가 되어버린 친구
를 위해 진혼축을 썼고 그 뒤 5년간 친구의 안식을 기원하는 미사를
올렸다. 구상은 "그 친구는 의협심과 인정이 강하고 시심이 있는 사
람이었다"면서 "난세에 파격적인 인물들을 모아서 혁명을 일으킨 뒤
에 정상적인 사람들로 주변을 교체해가는 과정에서 갈등도 많았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람을 죽인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