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골목길을 걷는 남학생과 여학생. 골목을 가로막고 서는 불량
배들에게 둘러 싸인다. 필사적으로 도망치지만 이내 막다른 길에 다다
른다. 각목이 난무하고 무릎으로 배를 걷어차인다. 남학생은 쓰러지고
불량배들이 쓰러진 남학생을 짓밟는다. 불량배들은 여학생도 벽으로 밀
어붙인다. 쓰러졌던 남학생이 다시 일어나 불량배들에게 대항해보지만
다시 뭇매를 맞는다.

갱영화가 아니다. 청소년들의 우상이라는 댄스그룹 H.O.T의 '전사의
후예'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장면이다. 요즘 케이블TV 뮤직채널에 반복
해 방송되고 있다.

구본승이 부른 '시련'이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 김소연 정찬 이휘
재 김정화 강성민 같은 인기스타가 대거 출연하는 이 비디오에는 각목
과 도끼를 동원한 폭력장면이 이어진다. 홍콩 느와르 같은 화면에 '자
극'이 넘친다.

지난 7일 SBS TV '인기가요 20'은 공중파 프로그램인데도 동성애를
암시하는 듯한 여성 듀엣 수의 뮤직비디오가 방영됐다. 구피의 '많이많
이', 업타운 '다시 만나줘', 린다 '위험한 상상' 같은 뮤직비디오는 남
녀간 애정표현이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묘사돼 있다.

뮤직비디오 화면뿐 아니다. H.O.T는 2집 '늑대와 양'을 내놓으면서
늑대춤과 태권도춤을 선보였다. 늑대가 울부짖는 듯한 동작과 늑대를
물리치는 태권도 동작이 주를 이룬다. 멤버들끼리 주먹을 휘두르고 맞
는 동작이 이어진다. 청소년 팬들에게 이들의 동작 하나하나는 곧 '행
동의 교과서'가 된다는 점에서 그 역기능이 우려된다.

청소년들이 폭력-선정 뮤직비디오를 접할 기회는 더욱 많아졌다. EBS
위성교육방송이 시작되면서 케이블 가입이 4배 넘게 늘고 있기 때문이
다. 리모컨만 누르면 H.O.T나 젝스키스를 종일 볼 수 있고, 뮤직 비디
오들에도 거의 무방비로 노출돼있다.

심의기관인 종합유선방송위원회는 팝은 사전에, 가요는 사후에 심의
하고 있다. 그런데도 자극적인 장면들은 모두 무사통과됐다. 케이블TV
자체적으로도 95년말부터 자율심의기구를 가동하고 있지만 그런 장면들
을 문제삼아 방송불가나 재편집을 요구한 경우는 거의 없다. 기독교윤
리실천운동 전종천 기획실장은 "늦어도 연말이면 케이블TV를 전담하는
모니터팀을 가동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 도곡동에 사는 주부 김지영(37)씨는 "검찰총장까지 청소년 폭
력 직통전화를 개설하는 판에 TV가 폭력적 뮤직비디오를 거르지 않고
내보내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비밀번호를 설정해 특정채널을 못보게
하는 기능이 보다 널리 홍보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