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연세대교수'.
조
선조 역사에서, 아니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빼어난 두 인물을 들라
면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왕과 이충무공을 들 것이다. 세종대왕과 이충
무공은 비단 한국사의 위인일 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거인이라 해도 이
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줄 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인됨을 처음으로 나라 밖의 '세계'에 알린
사람은 명의 수병도독 진인. 정유재란때 지원군으로온 중국의 무장이었
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임진왜란 당시의 재상 유성룡은 그의
'징비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진인은 성질이 사나워서 남과 거스르는 일이 많으므로 사람들은 그
를 두려워 하였다. 나는 진인의 군사가 고을의 수령을 때리고 욕하기를
꺼리지 않고 새끼줄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어서 온 얼굴이 피투
성이가 된 것을 보고 통역관을 통하여 풀어주도록 하라고 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유성룡은 이러한 진인과 함께 있으면 '이순신의 군사가 어찌 패전하
지 않을 수 있겠는가'고 탄식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진인이 이순신을
'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
은 공)이 있는 위인이라 칭송하고 제 나라 황제에게도 아뢰어 충무공에
게 명의 도독인을 내리게까지 하였다. 이순신의 '재주와 책략과 기량과
능간' 앞에 마침내 포악한 진인도 마음으로부터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세종대왕과 충무공은 다같이 53세라는 길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점에
서 우연의 일치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두사람의 삶에는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두드러진다. 무엇보다도 세종대왕이 순경속에 있었던 성군이
라면 충무공은 역경의 극한상황과 싸워 이긴 성웅이었다.
임란 7년간에 걸쳐 쓴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필사본 국보 7호)는
눈물 없이는 읽어낼 수 없는 책이다. 이순신의 삶은 '비극적인 삶'이었
다. 그에게는 세종대왕에겐 없는 '비극적인 위대함'같은 것이 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전권을 일관하여 반복되고 있는 듯한 세가지 모
티브가 떠오른다.
첫째는 출중한 무장이 간결하게 기록한 엄격한 진중, 생활속의 '루
틴'(일상과정). 둘째는 다정다감한 인간이 토로하는 회포와 가족애, 특
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 그리고 셋째는 임란 개전초부터 충무공을 일종
의 '강박관념'처럼 괴롭혀 온 문제의 인물, 경상좌수사 원균의 존재가
곧 그것이다. 이 원균이 이순신을 무고하여 죽음으로 몰고가는 줄거리
는 '셰익스피어적 스케일'을 갖는 일대 음모극이다. 그 모함의 덫에 걸
린 이순신은 한산대첩의 영웅에서 하루 아침에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
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
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 얼토당토 아니한
죄명으로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그리스 고전비극의 주인공
처럼 '비극적 무죄' 속에서 죽어가려는 그를 가까스로 구해낸 사람이
우의정 정탁. 왜구의 재침이 임박한 정유년(1597년) 4월초 1일 "옥문
밖으로 나왔다"는 말로 반년만에 다시 계속된 '난중일기'는 "울적한 마
음한층 이기기 어렵다"고 적혀 있다.
관직을 삭탈당하고 풀려난 이순신은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도원수 밑
에서 '백의종군'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처음 겪는 일은 아니
었다. 이미 그의 나이 42세때 녹둔도 사건으로 백의종군 한 바가 있었
다. 그러나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는 충무공 앞에는 보다 더 가슴 쓰라
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음이
그것이다.
출
옥한지 열흘째 되는 4월11일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새벽에 꿈
이 몹시 산란하여 마음이 매우 불안하다.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여 눈
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다. 그래서 종을 보내서 어머님의 안후를
알아 오게 하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4월 13일.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나가 뛰며 뒹구
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랴(뒷날 대강 적었다).".
본시 '난중일기'는 그 첫장부터 자나깨나 극진하게 어머니를 생각하
는 이순신의 효심이 도처에서 독자들의 가슴을 때린다. 예컨대, 임진년
(1592년) 정월 초 1일 "맑다.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과 아들 회가
와서 얘기했다. 다만 어머님을 떠나서 두번이나 남도에서 설을 쇠니 간
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계사년(서기 1593년) 4월초 4일 "맑음.
이날은 어머님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
을 드리지 못하게 되니 평생 유감이다.…" 계사년 6월12일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다. 흰 머리털이 싫어서가 아니라 다만 위로
늙은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다음해 전란이 소강상태가 된 틈을 타서 이순신은 어머니를 찾아 뵙
게 된다. 갑오년 1월초 1일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 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 동 12일
"맑음.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
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번 세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으로
탄식하지는 아니하셨다.".
충무공의 어머니다운 현부인의 모습이 역력하다. 그 어머니가 아들
이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근심으로 애를 태우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난중일기'는 이때부터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이순신의 내면을
들춰내 보여 주고 있다.
"마을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아픔이야 어떻게 다 말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
길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
다…"(정유 4월16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같은 사정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은 것만 같지 못하구나…"(정유 4월19일).
이해 7월 이순신을 모함하여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던 원균이 왜군
의 유인전술에 빠저 거제 앞바다에서 전멸됨으로써 일찍이 이충무공이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제서야 어
리석은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한다.
충무공이 붙잡혀가면서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할 당시 한산도에는 밖
에 비축해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약 1만석이 있었으며 화약은 4천근,
총통은 각선척에 적재한 것 말고도 3백자루나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옥에서 풀려나 다시 통제사가 되어 내려온 이순신에게는 모든
것이 소실되어버리고 고작 군사 1백20인과 병선 12척이 남아있을 뿐이
었다. 이떠의 충무공 모습을 생각하면 코카서스산의 독수리에게 가슴을
갉아먹힌 프로메테우스처럼 '신화적인 스케일'을 갖는 비극의 주인공을
연상케 한다.
정
유년 9월, 충무공은 이 12척의 전선으로 1백30여척이 몰려든 왜군
과 싸워 기적과도 같은 명량대첩의 전과를 거두게 된다. 이 해전 전야
의 '난중일기'는 특히 주목을 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살
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고 엄격
히 약속하였다. 이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
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하였다."(정유년 9월15일).
그 뒤 충무공의 장렬한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으나 '난
중일기'에는 물론 그 기록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정인보는 일찍이 '혼자서 전민족을 구해낸' 충무공에 대한 '보공'의
전이 너무도 허무하여 무덤 앞 신도비 하나나마 수삼대를 지나서야 겨
우서게 되었다고 개탄한 바 있다.
정조대왕이 '이순신 신도비명'을 쓴 것은 1794년, 충무공 사후 2백년
이 다 되어서이다. 왕명에 의해 '이충무공전서' 14권8책의 활자본이 간
행된 것도 1795년의 일이다.
내년 1998년은 충무공의 4백주기가 되는 해이다. 공의 3백주기는 격
동의 구한말에 아무도 챙기지 못한채 지내고 말았다. 그러나 '덕을 표
시하고 공로를 보답함은 국가의 거룩한 예전'(상덕보국 유국최전)이다.
충무공의 4백주기를 내년에 어떻게 치를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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