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병원에서 9일 타개한 동산 윤치영옹은 독립운동가, 학자,
정치가로서 두세기에 걸쳐 온갖 영욕을 겪은 현대사의 증인이었다.

음력 1898년 2월10일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중앙고보(현 중앙고)
와 와세다(조도전)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대학과
조지워싱턴 대학을 거쳐 34년 아메리칸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일제때인 36년 YMCA 부총무시절 일제와 맞서다 9개월간 옥고를 치
르기도 했던 동산은 해방후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발기인으로 정계
에 입문했다.

그는 이어 박사의 비서실장과 제헌및 2, 3, 6, 7대 국회의
원, 초대 내무장관, 국회부의장, 대한국민당 당수, 공화당의장등 70
년대초반까지 정계와 관계를 넘나들며 화려한 관운을 누렸다.

특히 제헌의원과 초대 내무장관을 지내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
과 발전에 나름대로 족적을 남겼다.

그는 5.16 쿠데타로 정권이 들어선 63년 현 자민련
총재의 권유로 공화당에 입당, 두차례 당의장을 지냈다. 당시
최고회의의장을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 민정에 참여토록 한 것도
동산이었다.

윤옹은 당시 야당 대통령후보들을 겨냥, "만약 구정치인들이 정권
을 잡는다면 몇달안에 혁명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폭탄발언을 해
정가에 파문을 일으키는 등 눈치를 살피지 않는 거침없는 언행으로
적지않은 화제를 뿌렸다.

동산은 정계은퇴 후에도 92년까지 서울시 직원들의 모임인 서울시
우회장과 안중근의사 숭모회장을 맡아 왕성한 사회활동을 계속하는 등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였다.

말년까지도 `멋쟁이'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골프를 즐겼으며 트레
이드마크인 빨간 넥타이를 즐겨 맸다.

자신의 인생역정과 한국정치사의 이면을 담은 회고력 `윤치영의
20세기'를 출간했으며 20년대 미국 유학시절부터 수집해온 장서 3천1
백18권과 제헌국회 개헌기념사진등 기념물 1백21점을 에 기
증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인선씨(48)등 1남1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