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기마병단 무장 중부-하이집트까지 지배 혈통-어계 불명 부
바스티스를 떠나 아바리스를 찾아간다. 그러나 부바스티스와 마찬가지로
아바리스라는 곳은 현대의 이집트 지도에는 없어 안내인의 고고학적 지식
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따르면 옛 타니스의 유적 가까운 곳
에 아바리스의 폐허가 있다는 것이었다.11월이지만 델타의 한낮은 우리
의 여름날이나 별로 다름이 없었다. 위도는 높아도 거미줄처럼 얽힌 수
로들과 나일의 지류, 그리고 지중해의 습기가 체감온도를 높게 만드는
듯 했다. 가는 도중 차를 세우고 마련해간 도시락으로 늦은 점심을 때
웠다. 길가에 펼쳐진 논에 베어진 벼의 그루터기가 반가웠다. 다시
아바리스를 찾아가는 차속에서 이제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되는 이집트의
역사를 간추려 본다. 중왕국의 영화는 생각보다 짧아 12왕조로 끝나고
이른바 제 2중간기가 시작된다. 13왕조는 17왕조까지 약 2백년간
이 그 시기이다.13, 14 왕조는 이집트인의 왕조로서 이집트 전토를
지배하지는 못한 왕조들이었고, 어느 시기는 병립하기도 했다. 15,
16 왕조는 이민족인 힉소스의 왕조로서 역시 이집트 전토를 지배하지
는 못했다. 우리가 찾아가는 아바리스는 바로 그 힉소스왕조가 도읍했
던 곳이다. 힉소스는 아시아계 기마민족으로 동쪽에서 왔다는 것외에는
혈통도 어계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민족이다. 힉소스란 말도 특정한
민족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이방의 족장들 이란 뜻의 이집트어가 그리
스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변조된 말이라고 한다. 힉소스의 델타침입은
그 당시 서아시아에 있었던 대규모의 민족이동과 관련된 것으로 보여진
다. 그러나 아시아계 민족들의 유입은 이미 중왕국시대부터 있어온 현상
이었다. 노동자로서 기술자로서 또는 교역을 통해 수가 불어난 그들도
힉소스의 급속한 세력확대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델타 동쪽으
로 침입한 그들은 아바리스에 터를 잡고 독립된 세력을 키워나갔다. 날
로 쇠약해가던 13 왕조와 한 지역정권으로 병립하고 있던 14 왕조는
그들을 격퇴할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 이민족이 왕조의 형태를
갖추는 것은 살리타스 혹은 셰시라는 군주 때였다. 그들은 동쪽 아바
리스를 근거지 삼아 차츰 델타 심장부로 세력을 뻗어나갔고 이집트인의
13, 14왕조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그들의 기마대와 전차에 차례로 무
릎을 꿇고 만다. 그리고 델타를 장악한 힉소스는 다시 남하하여 멤피스
를 차지함으로써 하이집트 뿐만 아니라 중부지방까지 세력을 뻗친다.
이집트문화 존중 오래잖아 테베를 중심으로 17 왕조가 열리지만 그
세력은 상이집트의 노모스 몇개에 국한되는 미미한 것이었다. 자가지그
쪽으로 북상하던 차는 큰 수로를 따라 난 국도로 두시간을 넘게 달려
아바리스로 추정되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은 낮고 아주 넓은 사구로서
남아있는 것은 그때껏 본중에서도 가장 철저하게 파손된 폐허였다. 사
방으로 트인 사막 가운데 옛건축물과 잔해가 띄엄띄엄 남아있는데 대개는
자연석 덩이와 다름없을 정도로 원형과 용도가 전혀 가늠되지 않는 것
들로서 그것도 말 그대로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아있지 않은 형국이
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파손상태가 오히려 그곳이 아바리스일 것이라
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신왕국이후에 거세진 민족주의가 이민족 침입자들
에 대한 적의를 그렇게 철저한 파괴로 표현했으리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힉소스의 지배가 억압과 착취로 표현된 곳은 많지만 대개 그것들은
신왕국이후의 기록인 경우이다. 객관적으로 보아 힉소스왕조는 꽤나 현명
한 통치술을 채택했던 것같다. 곧 이집트의 제도와 문화를 존중해 그
바탕위에서 지배체제를 세웠고 자신들의 문화나 제도를 강요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뒤의 정복자들이 한결같이 답습했던 이집트통치술이었다. 그런
데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어떤 정치적인 목적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전
통적인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오시리스를 주신으로 삼은데 비해 힉소스의
왕들은 오시리스의 적인 세트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나중에 그 세
트가 중근동의 바알신이나 히타이트의 테슈브와 동일시되는 것도 재미있다
. 힉소스의 왕궁이었는지 신전이었는지 조차 알아볼 수 없는 그 터를
거닐면서 아바리스의 최후의 날을 상상해보았다. 철저한 파괴의 흔적에
다 정복자로서는 무자비한 이집트인의 성격을 바탕삼아 이끌어낸 상상은
절로 끔찍하고 비극적인 것이었다.중왕국을 일으킨 테베왕조와 거의 일치
한 기반을 가진 17 왕조는 처음부터 힉소스 왕조와 격렬한 적대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성 싶다. 그러다가 이집트의 해방자요 18왕
조의 창시자가 되는 아모스(아하메스)의 선왕 카모스때가 되면 사태는
일변한다. 카모스는 그동안 축적된 힘과 달구어진 민족주의의 열기에 힘
입어 먼저 누비아를 정벌하고 힉소스와 싸움을 시작한다. 그러나 힉소
스를 이집트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 것은 그의 후계자 아모스였다. 아모
스는 즉위 11년에 힉소스 정벌의 대군을 일으켜 16년 사루헨을 함락
시킴으로써 백년에 걸친 이민족의 통치를 종식시킨다. 힉소스에게서 배운
기마술과 전차를 구사한 새로운 전법과 이민족 침입자들에 대한 적개심
이 그 승리의 주된 원인이었다. 아모스왕에 패배 아바리스도 그 기
간중 몇년에 걸친 아모스의 포위공격을 견디다가 마침내 무너져 버렸다.
그때 아마도 이 참혹한 파괴에 짝할만한 학살과 방화가 있었을 것이다
. 아모스의 대군에 둘러싸인 외로운 섬같은 아바리스 최후의 날이 삼천
오백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객쩍은 감회로 가슴에 닿아왔다. 그런데 나
중에 참으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그곳이 아바리스로 믿고
돌아왔으나 알고 보니 그곳은 아바리스의 옛터가 아니었다. 아바리스는
거기서 남쪽으로 20여㎞ 떨어진 곳에 따로 있고, 착실히 발굴이 진
행되어 이제는 이름난 유적지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다음으로 찾은
타니스의 유적은 아바리스라고 믿은 그 이름모를 유적지에서 4킬로미터
남짓되는 곳에 있었다. 타니스는 정복왕 람세스 2세가 동방경략을 위해
건설한 도시로서 19 왕조의 델타지역 수도격이였으며 22 왕조때는
실제로 수도로 쓰이기도 했다. 따라서 람세스 2세의 동상을 빼면 유
적은 대부분 22 왕조의 왕들과 연관된 것이었다. 보존상태는 그리 좋
지 않았으나 가운데 있는 아몬신의 대신전은 당대의 위용을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정확한 수치로 비교해보지는 않아도 터로 미루어서는 나중에
보게될 그 어떤 신전에 못지 않을 듯 했다. 그 신전 뒤쪽에 있는
신성한 호수 도 나중에 룩소르에서 되풀이 보게 될 신전양식의 전형이
될 것이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