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고 긴다는 MIT 미디어랩에도 전설처럼 전해 오는 뼈아픈 실패담이 있다. 3년 전 연수 때 여러 차례 들은 '모든 어린이에게 컴퓨터 한 대씩'이란 프로젝트다. 미디어랩을 세운 니컬러스 네그로폰테가 주도해 2005년 시작했다가 2014년에 사실상 접었다. 발상은 그럴싸했다. '저개발국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보급해 디지털 인재로 자라게 하자.' 실패했다. 저개발국 아이들은 컴퓨터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르쳐줄 선생님도 없었다. 알렉시스 호프 미디어랩 연구원의 얘기다. "사용자 의견을 미리 들었어야 했다. 이들은 컴퓨터보다 식수·백신을 원했다. '컴퓨터가 너희를 구원하리라'는 발상은 배부른 미국인들의 허세일 뿐이었다."
얼마 전 인터뷰한 대만의 오드리 탕 디지털 장관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천재 해커'로 이름을 날려온 그는 "내 일은 국민의 목소리를 수집해 이를 증폭하는 것이다. 장관이 된 후 5461명을 만났다"고 했다. 코로나를 잘 막아낸 대만은 방역에도 국민 아이디어를 많이 접목했다. 예를 들어 한국도 따라 도입한 코로나 마스크 재고 앱은 대만의 한 일반인이 가족·친구를 위해 만든 채팅방을 정부가 발전시켜 완성했다. 탕 장관은 매주 수요일 장관실을 완전히 개방한다. "국민의 기발한 발상을 듣기 위해서"란다.
한국을 돌아본다. 소통을 내세워 당선된 대통령과 정부는 현장 목소리를 얼마나 듣고 있나. 정부가 귀를 막고 있다는 답답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급기야 이번 주엔 국민 의견 수렴 창구라며 만든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정부 비판 글이 인기를 끌자 이 게시물을 숨겼다는 논란까지 발생했다. 누더기가 된 부동산 정책의 입법 과정에도 국민 의견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집값을 잡겠다'는 구호 아래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법이 대부분이다.
부동산 시장은 참으로 복잡해서 '세입자를 보호하려면 임대료를 못 올리게 하면 된다' 같은 단순한 정책은 잘 먹히지 않는다. 집값과 집세가 오히려 오르는 등 부작용이 잇따라 불거진다. 그런데도 정부는 국민 사이에서 왜 '비명'이 나오는지 진지하게 알아볼 생각이 없다. 국토부 장관은 오히려 "이럴 때 집을 사다니"라며 혀를 찬다. 코로나 재확산 와중에 의사 파업까지 불러온 갑작스러운 의대 정원 확대, 외곬으로 밀어붙이는 원자력발전소 전면 폐쇄…. 입맛에 맞지 않으면 일반 국민과 전문가 모두에게 귀를 닫는 정부가 사회를 피곤하게 한다.
대만 디지털 장관은 IT 거물,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사 출신이다. 각 분야 전문가인 이들은 '그래도 국민이 더 잘 안다'고 말한다. 그다지 전문적이지도 않은 한국 관료들은 반대다. 부동산·방역 등 일이 안 풀리면 국민이 잘 모르거나 잘못해서라 한다. 탕 장관은 말했다. "우리는 국민이 반대하면 이기려 하지 않는다. 합류해버린다. 지지율 94%를 얻는다 해도 만족하지 않는다. 6%에겐 그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정부엔 소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민국(民國)이다." 뒤집으니 한국 버전이 된다. "정부는 국민이 반대하면 들으려 하지 않는다. 밀어붙여 버린다. 조금이라도 호응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걸로 만족한다. 어쨌거나 골수 지지층은 안 떠나니까. 소수는 무시된다. 이것이 민국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