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류호정(28) 의원이 지난 4일 국회 본회의장에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참석한 것을 계기로 우리 국회에도 '드레스 코드(dress code·복장 규정)' 논쟁이 불붙었다. 일부에서는 "국회의 격(格)과 권위를 떨어뜨리는 복장"이란 비판을 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이제 우리 국회도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류 의원은 6일에는 청바지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국회로 출근했다. 류 의원은 이날 "국회의 권위가 양복으로 세워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지금 50대 중년 남성 중심의 국회라고 하지 않나. 검은색, 어두운 색 정장과 넥타이로 상징되는 측면이 있었고 이런 관행을 좀 깨보고 싶었다"고 했다. 의회의 원조인 영국 하원(下院)이 2017년 전통을 깨고 의원들에게 '노타이'를 허용할 때 벌어졌던 드레스 코드 논쟁이 한국 국회에서도 점화된 것이다.
1992년생으로 21대 국회 최연소인 류 의원은 자신의 옷차림을 둘러싼 논란에 "화이트칼라 중에서도 일부만 양복 입고 일한다"며 "시민을 대변하는 국회라면 일할 수 있는 어떤 옷이든 입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국회에서 원피스와 청바지는 왜 안 되느냐"는 것이다. 정장으로 상징되는 권위와 격식 중심 의회 분위기에 실용적 옷차림으로 논쟁거리를 던지겠단 뜻이다.
1215년 '마그나카르타(대헌장)'를 제정하면서 시작된 영국 의회는 2017년이 되어서야 '노타이'가 허용됐다. 그 과정에서 논쟁도 거셌다. 2017년 7월 영국 의사당에서 당시 보수당의 한 의원이 의사 진행 발언을 통해 다른 당 소속 의원이 넥타이를 매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다. 당시까지 영국 의회 규정집에는 남성 의원들은 정장에 넥타이를 매는 게 관습으로 돼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원의장이 "넥타이를 매는 게 필수는 아니다"라는 유권해석을 내놓으면서 영국 의회 옷차림 논쟁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미국에선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에 도전했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공식 석상에서 통 넓은 바지 정장을 고수했다. 남성들을 중심으로 '워스트 드레서(worst dresser)'란 이야기가 나왔다. 외신들은 이를 '여성'이 아닌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의도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외국에서도 의원 복장 논란이 불거졌을 때 잡음 없이 관대한 쪽으로 의견일치를 본 경우는 많지 않다. 2012년 프랑스 세실 뒤플로 국토주택 장관이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의회에서 연설했을 때 일부 남성 의원은 휘파람을 불며 야유를 보냈다. 2017년 프랑스 하원에서 한 의원이 축구 유니폼 차림으로 연설했다가 벌금 처분을 받았다.
영국 노동당의 트레이시 브레이빈 의원은 지난 2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하원 회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발언 중 옷자락이 흔들리면서 한쪽 어깨가 노출됐다. 그러자 '술집 여자냐' '모유 수유하느냐' 등 비난이 나왔다. 미국의 마사 맥샐리 의원은 2017년 민소매 옷에 발가락을 드러낸 신발 차림으로 하원에서 연설했다. 여성 기자들이 어깨가 드러나는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의사당에서 쫓겨난 사건에 항의하는 차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류 의원의 차림새를 두고 누리꾼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시작됐다. 일부에선 '장례식장에서도 격식을 지키듯 국회에서도 국민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격식 있게 입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이에 대해 류 의원은 "국회가 장례식장은 아니지 않으냐"며 "시간·장소·상황이라는 것도 바뀔 수 있고, 양복 입고 일하는 직장인은 전체 시민 중 굉장히 일부"라고 했다.
여야 정치권은 겉으로는 "권위적이고 구시대적인 국회 복장 관행을 깨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원피스는 수많은 직장인 여성의 출근 복장"이라며 "갑자기 원피스가 입고 싶어지는 아침"이라고 했다.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류 의원 의상을 문제 삼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했다. 한 정치권 인사는 "젊은 세대의 부상과 탈권위 시대 분위기에 의원들이 정면으로 류 의원 복장에 이견을 제기하는 어려운 분위기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국회법엔 '국회의원 품위 유지'라는 포괄적 조항만 있을 뿐 복장에 대한 규정은 따로 없다. 그러나 과거 여성 정치인은 '치마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1993년 바지 정장 차림으로 국회에 출석한 황산성 환경처 장관이 잠시 바지에 손을 넣자 남성 의원들로부터 "여자가 바지 차림으로 건방지게"라는 소리를 들었다.
21대 국회 들어서는 의원회관에서 티셔츠를 입고 일하는 의원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고 넥타이에 정장 대신 콤비 차림으로 당 회의에 나오는 남성 의원도 적잖다. 국회 관계자는 "정장을 고집하는 시대는 흘러간 것 같다"며 "다만 어떤 옷도 상관없다는 식은 논란을 부를 수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