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넘어 대동강 다리 건너가"… 화염 뒤덮인 戰場의 진실을 쓰다

조선일보
입력 2020.06.30 05:01

[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35] 포화 속 누빈 종군기자들

70년 전 6·25 전란 와중에도 조선일보 기자들은 포화(砲火) 속으로 뛰어들어 전쟁 현장을 취재했다. 김해룡, 전동천, 최병우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김해룡: 개머리판으로 맞고 얻은 특종

"이런 기사를 누구 마음대로 쓰는 거야!"

1950년 10월 평양, 한 군인이 조선일보 편집부 기자 김해룡의 머리를 소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평양에서 자란 김해룡은 국군의 평양 탈환 직후 현지에 특파돼 일선판 신문을 발행했고, 동장(洞長)들이 모이는 회의장에 잠입해 자료집을 입수한 뒤 새로운 시민증 발급 기준에 대해 상세히 보도했다. 당시 평양 시민에겐 시민증이 공산주의자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군 당국은 당장 김해룡을 잡아 가 폭행했다. 피가 솟구치고 의식이 희미해져 갈 때, 한 장교가 "어떤 놈이 이랬느냐"며 개머리판을 휘두른 군인에게 총구를 겨눴다. 김해룡은 급히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돼 살아났지만 평양의 가족과는 그 길로 영영 헤어졌다. 그는 "나를 살려준 장교는 신문사와 관련 있는 인물일 것"이라고 회고했다. 소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김해룡은 통신사 문서 배달을 하던 독학파. 굶어도 지조를 지켜야 한다는 꼿꼿함을 보였던 그는 '면도날'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김해룡, 전동천, 최병우
김해룡, 전동천, 최병우

전동천: 평양 최후의 날을 취재하다

1950년 12월 4일, 중공군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포기했다. 폭음과 화염, 아우성이 뒤덮인 아비규환 현장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전동천이 있었다. 그는 12월 13일 자 조선일보에 '평양 최후의 날―죽음으로 찾은 자유'라는 제목의 생생한 르포를 실었다. "대동강의 가교가 최후 철수 부대의 손으로 끊긴 다음에도 이 가교로 모여드는 남하 피란민의 수는 무수했다. 그들은 파괴된 가교를 드럼통과 부서진 가교의 목편(나무 조각) 등으로 얽어매 가지고 건넜다. … 쓰러지는 사람의 시체를 넘으면서도 도강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이 기사는 제1차 교육과정(1954~1963) 중학교 2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평북 정주 출신인 전동천은 평양민보사 기자로 일하다 1947년 38선을 넘었다. 6·25 때는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취재하다 1952년 9월 수도고지 탈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최병우: 휴전협정 역사의 기록자

"아, 만사휴의(萬事休矣·모든 일이 중단됨)! 백만의 동포가 흘린 피의 값을 어디서 찾아야 옳단 말인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조인한 판문점, 역사적 현장을 취재하는 한국 기자 단 두 명 중 한 명인 조선일보 외신부 최병우가 탄식했다. 그는 기사에서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며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 한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썼다. 또 "우리가 그리지 않은 분할선이 울긋불긋 우리의 강토를 종횡으로 그려져 있을 것"이라며 민족의 험난한 앞길을 우려했다.

한국은행에서 근무하다 1952년 외신부 차장으로 조선일보에 입사한 최병우는 뛰어난 영어 실력과 학구열로 언론계의 주목을 끌었다. 종군기자를 자원했고, 매일 새벽 4시 무거운 타이프라이터를 들고 판문점 종군기자 숙소로 달려가느라 식사를 거르기 일쑤였다. 1954년 한국일보로 옮겼고, 1958년 진먼다오(金門島) 해역에서 중국·대만의 군사 충돌을 취재하던 중 조난당해 34세에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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