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해 인생 전부를 걸었던 사과나무를 모조리 묻어야 합니다."
지난 27일 충북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에서 만난 이모(54)씨는 이제 희망이 없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주 사다리를 빌리러 온 지인이 나무가 이상하다는 말에 황급히 농장을 둘러본 이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지 끝이 불에 탄 듯이 바짝 말라 있는 모습이 분명한 과수화상병이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지난해 농장 2곳(2만 ㎡)에서 과수화상병이 발생해 사과나무 750주를 땅에 묻었는데, 남은 2곳(8000㎡) 마저 과수화상병이 휩쓸어 700주의 사과나무를 끌어다 묻어야 할 처지"라고 토로했다.
2008년 인천에서 하던 장사를 모두 접고 충주로 귀농한 이씨는 2년간 대학에서 관련 기술을 배우고 2010년부터 사과농장을 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간 소득 없이 투자만 해오다 2018년 첫 수확의 기쁨을 맛봤다. 하지만 상품성과 수확량이 가장 좋을 시기였던 지난해 과수화상병이 덮쳐 농장 절반을 매몰했다. 올해도 남은 사과나무를 모두 묻어야 할 처지에 놓이면서 그의 ‘귀농의 꿈’도 함께 묻혔다. 그는 “사과 농사 10년이다. 이제야 소득을 올리려나 기대했는데 소득은커녕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며 쓴웃음을 졌다.
과수화상병은 주로 사과나 배 등 장미과 식물에서 발생한다. 감염되면 잎과 꽃·가지·줄기 등이 불에 그슬린 것처럼 변하면서 결국 고사하는 국가 검역병이다.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고, 치료제도 없다. 특별한 예방법이 없어 4∼5월 새 가지나 꽃눈이 나오기 전에 사전 방제하는게 고작이다. 알려진 바로는 기온이 영상 18도일 때 균이 가장 활발해진다. 벌과 파리 등 곤충과 비바람, 농작업 도구 등을 통해 전염된다. 충북도 농업기술워 윤철구 박사는 "과수화상병이 발생하는 원인은 다양하게 추정되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현재 농촌진흥청에서 원인과 약제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라며 "이번에 발생한 충주지역 과수화상병은 다른 곳에서 확산된 것보다는 지난해 잠복했던 균이 기후 조건 등과 맞물려 한 번에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2015년 안성에서 처음 발견됐다. 그해 충북에서는 제천시 백운면에서 시작해 퍼지기 시작했고, 이후 과수화상병은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해 충북은 충주 76곳, 제천 62곳, 음성 7곳 등 과수원 145곳(88.9㏊)에서 과수화상병이 발생했고, 피해 보상금은 270억2000만원에 달했다.
올해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지난겨울 높은 기온으로 개화시기가 빨라지면서 지난해보다 1주일 빨리 과수화상병이 발병했고 확산세도 심상치 않다. 올해 초 농촌진흥청이 구리 성분을 함유한 과수 화상병 예방 약제 4가지를 선정하고, 이를 과수 개화 전과 후로 나눠 3차례 방제하면 예방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 농민들은 3차례 걸쳐 방제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현재 충북 북부(충주·제천·음성) 지역으로 과수화상병이 예년보다도 급속히 확산하는 추세다.
29일까지 충북에서 확진 판정을 받은 농가는 모두 60곳이다. 충주가 57곳, 제천이 3곳이다. 현재까지 누적 의심신고는 충주 158곳, 제천 29곳, 진천 2곳, 음성 1곳을 포함해 모두 190곳이다. 이 중에서도 충주 산척면이 가장 심각하다. 산척에서만 42 농가에서 확진 판정을 받았다.
지난 27일 산척면 마을은 농사일로 한창 바쁜 철인데도 사과농장은 사람 한명 찾아볼 수 없었다. 빨갛게 익은 사과 대신 출입을 금지하는 시뻘건 줄들이 치렁치렁 내걸린 농장들이 산척의 상황을 대신 전하고 있었다.
이곳서 25년간 사과를 재배한 홍모(75)씨는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3차 방역까지 다 마쳤다. 안심하고 적과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이 지경이 됐다"라며 "마을 대부분이 사과농사를 짓는데 어느 한 집 거르지 않고 온통 쑥대밭이 됐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농장에서 만난 석모(63)씨는 "지난해 앞집까지만 화상병이 돌아서 안심했는데 올해는 온 마을을 휩쓸고 있다"라며 "이런 상황이면 내년도 후년도 안심할 수 없다. 정부 방제를 믿었는데 허탈하다. 현재 과수농가들은 절망적인 상태"라고 하소연했다.
올해 초 새롭게 바뀐 보상 규정도 피해 농가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농촌진흥청이 올해 초 손실보상금 지급기준을 고쳤는데, 지난해 보상금액에 한참 못 미치기 때문이다. 농촌진흥촌은 과수화상병에 따른 손실보상금 지급 기준을 재배유형별 보상금 편차를 해소하기 위해 세분화했다. 지난해까지는 밀식(고밀도 재배, 사과 126주·배 56주 이상)재배, 반 밀식재배(사과 65~125주· 배 27~55주), 소식재배(저밀도 재배, 사과 64주·배 26주 이하) 등 재배유형별로 단가를 산정해 적용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10아르(a, 1000㎡)당 재배주수(심어진 나무 수) 단위로 세분화하고, 사과의 경우 10a당 최소 37주(그루), 최대 150주로 정했다.
또 나무를 뽑아낸 뒤 매몰하는 등의 방제 작업에 지출한 비용 지급기준도 달라진다. 기존에는 근원 직경(나무 밑동의 직경)을 기준으로 일정 금액을 지급했으나, 올해부터는 근원 직경 기준 금액의 상한액(최고한도 액수)을 설정하고 한도 내에서 실제 비용을 지급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농민들은 이 기준대로 적용해 보면 9920㎡(3000평) 당 대략 9000만원가량 적어진다며, 현실에 맞게 보상해야 한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과수화상병이 발생하면 과원의 나무를 뿌리째 뽑아 모두 매몰하고 폐원해야 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농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과원 전체 기준 발생률이 5% 미만이면 해당 나무와 인접 나무만을 제거하고, 5% 이상이면 전체를 매몰하고 폐원하는 것으로 지침이 바뀌었다. 매몰지에서는 3년 동안 균을 보유할 가능성이 있는 과수나무는 재배할 수 없다.
한 농민은 “과수화상병으로 매몰한 농장은 3년간 과수 나무를 심을 수 없다. 사과나무를 심고 첫 수확까지는 5년 정도 소요된다. 이 기간을 모두 합하면 적어도 8년이 지나야 수확을 할 수 있고 소득이 발생한다”라며 “그때까지는 계속 투자만 해야 한다. 이런 시간과 노력, 비용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보상규정”이라고 지적했다.
피해 농민들은 충주시 농기센터와 충북도 농기원, 농촌진흥청에 피해보상규정 현실화를 요구했다. 충북도 농기원 관계자는 “피해 농민과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방제대책과 피해보상 부분에 대해서도 논의할 것”이라며 “과수화상병이 인접지역으로 확산하지 않도록 철저히 방제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의심 나무가 발견되면 자체적으로 제거하지 말고 즉시 지역 내 농업기술센터로 곧바로 신고해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