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박동기 정보 실시간 전송, 한국만 30년째 'OFF'

조선일보
입력 2020.05.28 03:00

[팬데믹 시대, 역행하는 원격의료] [3] 있는 기술도 못 쓰는 한국
한국, 시술 환자 느는데 규제 묶여 멀쩡히 있는 기능 끄고 삽입해야
병원 가서 몇달치 정보 몰아서 체크… 응급상황 발생하면 대처 힘들어
"고위험 환자만이라도 허용하면 의료계 갈등 줄어들 것" 의견도

지난 2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박동기클리닉에 환자 김모(45)씨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김씨는 지난해 말 심장박동이 불규칙한 부정맥이 심해져 몸 안에 심장 기능을 돕는 박동기를 삽입했다. 간호사는 '완드(wand·지팡이)'란 장치를 김씨 가슴 위에 갖다 댔다. 그러자 지난 6개월간 박동기에 저장된 심박 수 등의 정보가 전송돼 모니터에 나왔다. 의사는 이 정보를 보고는 김씨에게 이상 증상은 없는지 등을 물었다. 김씨의 진료에 걸린 시간은 10분 남짓이었다. 그는 "경남 창원 집에서 서울 병원까지 3시간 걸렸다"며 "특별한 이상이 없어도 6개월마다 한 번씩 이런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25일 오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박동기클리닉에서 환자 김모(45)씨가 심장 박동기 검진을 받고 있다.
25일 오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박동기클리닉에서 환자 김모(45)씨가 심장 박동기 검진을 받고 있다. 박동기에는 맥박 등 환자 정보를 전송하고 문제가 생기면 의료진이 원격으로 조정할 수 있는 기능이 있지만, 국내에선 원격 의료가 금지돼 있어 이 같은 기능을 끄고 몸에 삽입한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정기적으로 병원에 와서 대면 검진을 받아야 한다. /오종찬 기자
이날 클리닉 앞엔 김씨처럼 박동기를 몸 안에 넣은 환자 10여 명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5년 전 박동기 삽입을 한 홍정자(64)씨는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린 끝에 의사를 볼 수 있었다. 홍씨는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매번 이렇게 병원을 와야 하니 나이 많은 환자 입장에서는 너무 불편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처럼 박동기 검사를 위한 '10분 진료'를 보러 전국에서 오는 환자는 이 병원만 하루 40~50명에 달한다.

◇외국선 30년 된 기능 우리만 못 써

박동기와 제세동기에는 실시간으로 환자 맥박 등 심장 상태를 감지해 원격으로 전송하는 기능이 갖춰져 있다. 부정맥을 미리 감지해 원격으로 조정하는 기능도 있다. 하지만 원격진료가 법으로 금지된 우리나라에선 의료진들이 이런 기능은 끄고 환자에게 박동기나 제세동기를 삽입한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병원에 와서 기기에 저장된 정보를 토대로 심장 상태를 진단받아야 한다.

심장삽입 전기장치 삽입 시술 추이 외
/조선일보
2018년 박동기 삽입 시술 건수는 4457건, 제세동기는 1366건에 달하고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이 환자들은 모두 이 같은 번거로운 과정을 겪는다. 정보영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심장내과 교수는 "원격 전송 기능은 외국에선 30년 전부터 사용하고 있고, 베트남 등 우리보다 의료 기술이 낮은 나라도 이미 도입하고 있다"고 했다.

의사들은 "번거로움도 크지만, 환자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대한심장학회 회장을 지낸 노태호 가톨릭대 성바오로병원 교수는 "심장 질환은 큰 문제가 나타나기 전 이를 예측할 수 있는 '이상 신호'들이 있다"며 "지금은 환자들의 몇 개월치 이력을 모아 한꺼번에 진단받는 구조니 제때 이런 신호들을 알아차리기 어렵다"고 했다.

◇"원격의료로 대형 병원 쏠림" 대 "고위험 환자에겐 허용해야"

국내 의료법에는 의사가 원격으로 환자를 진료하는 게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다. 환자에게 이상이 생기면 원격으로 기기를 작동시키는 등 의사의 판단이 개입하는 '원격 모니터링'도 금지된다. 보건복지부는 의사가 원격으로 환자 상태를 점검하다 문제가 생기면 '병원에 오라'고 전화하는 정도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유권해석을 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갔다가 원격진료 금지법을 어겼다는 지적을 받을까 봐 의료진은 몸을 사린다. 그래서 원격진료나 원격 모니터링 기술이 있어도 쓰지 못한다.

의료계 내에서 "원격의료를 점차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과 "원격의료를 허용하면 대형 병원만 유리할 것"이란 입장이 부딪치는 것도 원격진료 규제 매듭이 풀리지 않는 원인이다. 지난해 6월 의사 전용 지식·정보 공유 사이트 '인터엠디'가 의사 50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원격의료에 대한 부정적 응답이 61.4%에 달했다. 우려 이유 중엔 '환자가 대형 병원으로만 몰려 의원 경영이 악화된다'고 응답한 비율이 61.7%나 됐다. 그러나 정보영 교수는 "중증 심장 질환을 앓는 환자들은 어차피 동네 병원에서 진료를 보기 어렵다"며 "원격의료 대상을 '고위험 환자'로 한정하는 등 기준을 명확하게 정하면 갈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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