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브랜드와 인격

조선일보
  • 전은경 월간 '디자인' 편집장
입력 2020.04.02 03:08

전은경 월간 '디자인' 편집장
전은경 월간 '디자인' 편집장
회사가 있는 장충동 골목길에 오래된 문방구가 하나 있다. 그곳은 멀티 콘센트, 건전지, 계산기, 복사지, 슬리퍼 등 팔고 있는 물건들의 보통명사를 종이에 손으로 적어 유리창에 붙여 두고 있다. 지날 때마다 이곳이야말로 광고 청정 지역이구나 싶다.

얼마 전 한 기업의 리서치를 위해 간단한 질문을 받았는데 쉽게 대답이 안 나왔다. 취향을 파악하기 위해 평소 좋아하는 물건이나 브랜드를 묻는 질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이라는 말에 갑자기 입이 안 떨어졌다. 좋은 물건이구나 싶은 건 많은데, 그 브랜드를 좋아한다고 말하긴 왠지 껄끄럽고 싫었던 모양이다.

특정 브랜드의 어떤 제품을 좋아한다고 해당 브랜드까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객관적으로 브랜딩이 잘된 곳을 물었다면 할 말이 많았을 텐데. 어떤 브랜드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건 마치 좋아할 사람을 고르는 것처럼 신중해야 할 것 같았다. 홍보 책자를 살펴보면 다 나오는 브랜드 철학과 정체성, 유산에 관한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란 쉽지 않다. 마케팅의 대상이 되어 소비자 취급을 받고 싶지 않다. 특정 브랜드나 소비로 나를 표현한다는 말은 많이 식상하다.

[일사일언] 브랜드와 인격
한마디로 브랜드와 인격의 경계가 모호해졌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닐까 싶다. 모든 게 흥청망청 넘쳐나는 이 시대에 필요한 물건들은 어떤 가치와 매력이 있어야 할까? 이제 아무거나 사지 않는 사람들은 물건 하나를 골라도 나와 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최근 CEO들이 자신의 성향을 강요하는 발언으로 불매운동을 부른 사례를 생각해 보시라. 가성비나 기능이 뛰어난 게 다가 아니다. 어떤 브랜드의 가치관에 동의해 기꺼이 팬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은 거기에 인격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좋은 사람처럼. 진정성이란 단어의 진정성 없는 활용으로 이 표현 참 싫어했는데, 이참에 브랜드가 무엇인지 진정성 있게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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