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일 언론인

“흑사병은 1345년 3월 20일 토성, 목성, 화성이 물병자리의 40도 방향에 한 줄로 섰을 때 발생했다.” 흑사병이 유럽 인구의 30~50%를 쓰러뜨리며 휩쓸었을 당시 파리 대학 학자들이 내놓은 설명이다. 모르겠다는 이야기였다. 병원균은 1894년에 와서야 예르시니아 페스티스 박테리아로 판명되었다.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의 스위스 출신 연구자 알렉상드르 예르생이 알아낸 것이다.

흑사병이 유럽 전체로 그토록 맹렬하게 퍼진 건 이탈리아 제노바 거상(巨商)들이 개척한 해상 교역로와 대형 무역선 덕택(?)이었다. 크리미아에서 발생한 페스트균을 품은 벼룩, 그 벼룩을 업은 쥐들이 상선에 올라타 '재앙의 씨'를 온 유럽 항구에 퍼 날랐다. 대역병의 책임은 결국 초기에 사람 이동을 막지 않은 데 있었다. 1918년 스페인 독감 때도 그랬다. 이때도 전 세계에서 2000만명이 죽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군인들을 대거 고향으로 실어 나르다 균이 온 지역으로 퍼진 탓이다.

시진핑 중국발(發) 코로나19도 문재인 정부가 조기(早期)에 중국인 입국자들을 막지 않아 확 퍼졌다. 중국은 지금 한국인 입국을 막고 있다. 꼴 참 더럽고 우습게 되었다. "중국몽(夢)의 한 봉우리가 되겠다" "한국과 중국은 운명 공동체" "사드 추가 배치하지 않겠다" "미국 미사일 방어 체계(MD)에 들어가지 않겠다" "한·미·일 협력을 동맹으로 만들지 않겠다"며 온갖 조공(朝貢)을 다 바쳤는데도 기껏 돌아온 건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내 것"이란 '상국(上國)' 특유의 갑(甲)질이었다. 중국 탓이기 전에, 제풀에 납작 엎드린 문재인 정권 탓이었다.

기가 찰 노릇은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 지지도가 그의 코로나 초동 실패에도 50%대로 뛰어올랐다는 사실이다. 수도권 다수 지역에서도 미래통합당 후보들은 얼마 전과는 달리 고전(苦戰)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탈리아에 비해 문재인 정권은 코로나19에 한결 잘 대처하고 있다는 평판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이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이탈리아 공공 의료 수준·경영·시설이 한국 의료의 그것보다 현저하게 열악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의 그런 비교 우위를 문재인 정권 3년이 이룩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답은 '노(no)'다. 그건 순전히, 문재인 정권이 '적폐'로 몰아친 산업화 시대가 이룩한 것이다.

이 발전 과정에 오늘의 집권자 운동권은 삽질 한번 제대로 보탠 게 없다. 고속도로도 안 된다, 현대자동차도 안 된다, 포항제철도 안 된다, 거제 조선(造船)소도 안 된다, 모두가 해봤자 안 될 '식민지 반(半)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헛발질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승만·박정희 발전 모델의 적중(的中)이었다. 오늘의 세대는 현대사의 그 진실을 너무 모르거나, 좀 안다고 해도 "아니야. 그래도 저건 수구·꼴통·친일이야"라고 우긴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네오(新)마르크스주의 세뇌가 그렇게 셌다는 이야기다.

1980년대 이래 문화적 급진주의가 미디어, 영화, 음악·미술, '페미', 현대사 등 여러 분야에서 40대 이하 세대의 영혼을 온통 사로잡았다. 중·고교 때부터 세뇌당한 그들 의식은 "이승만·박정희는 모두 악(惡)이다"란 주술에 짙게 절어 있다. 요즘엔 현찰 뿌리기 '마약 요법'이 적잖은 청년·노인들을 중독시켰다. 이래서 문재인 정부가 잘못해도 잘한다는 콘크리트 표가 나올 수 있고, 보수 야당이 잘해도 잘못한다는 폄훼가 나올 수 있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그나마 만회할 길은 꼭 하나, 운동권 치하 야당이 야당다움을 회복하는 것이다. 운동권이 "나는 밤나무" 하면 강남 좌파·중간파는 "나도 반(半)은 밤나무"라고 한다. 야당이라면서 우당(友黨)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천안함 유족 윤청자 어머니는 반면에,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렇게 항변했다. "천안함 폭침 누구 소행이에요? 말해 보세요." 이게 586 '민중주의 파시즘'에 대한 레지스탕스 '본연의 야당다움'일 것이다.

미래통합당은 반문(反文) 연대를 위해 ‘본연의 야당다움’보다 유승민계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집토끼’들을 설득해야 할 처지다. 박형준·김형오·이석연·김세연에게 소외당한 ‘집토끼’ 상당수가 부동층에 가 있기 때문이다. 이 표가 아쉽다면 미래통합당은 해야 할 바가 있다. ‘집토끼’들에게 최소한의 돌아올 명분을 주는 것이다. 야당의 야당다운 외침과 몸짓을 하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