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사랑한 우리말] [9] 호숩다

조선일보
  • 박상분 67세·충남 천안
입력 2020.03.26 03:53

[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독자가 사랑한 우리말

엄마의 일생은 참으로 자연 친화적이었다. 첩첩산중 가야산 산골에서 태어나셨고, 더러 고뿔이라도 들면 한의원 하던 외할아버지가 한약 몇 첩 달여주셨을 테니 그렇다. 별로 높지 않은 꽃산 아래로 시집 오셨으니 또 그러하다. 엄마는 소리쳐 부르면 들릴 만한 멀지 않은 울타리 안에 늘 계셨다. 몇 발짝 되지 않는 초가삼간에서 종종걸음 치며 허리 펼 날 없이 집안일을 하셨을 테고 대문 밖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우물터에서 빨래하고 물 길어 와야 했으니 그렇다. 농번기엔 저 아래 밭에서 김매고 추수하는 일이 그나마 좀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었고, 5일장 서는 삽다리 장터에 가는 십 리 길 왕복 두어 시간 걸음이 큰 행차였을 것이다.

둘째 언니가 결혼해 서울에서 사는 건 동네에서 자랑거리였다. 그 큰 자랑거리는 어느덧 진짜 뽐낼 일을 만들어 냈다. 언니가 엄마와 재 너머 사시는 큰어머니께 서울 구경을 시켜드린 것이다. 딸 결혼식에서 한 번 입고 고이 접어 장롱에 두었던 노르스름한 양단 한복을 차려입고 서울 나들이를 다녀 오셨다. 삽다리역까지 1시간을 걸어갔을 것이고 거기서 화투짝만 한 기차표를 샀을 것이다. 서울역까지 통일호를 타고 얼추 세 시간쯤 달렸을 텐데 객실에서 홍익회 아저씨의 주전부리 파는 구성진 목소리는 못 들은 척하셨을 게 뻔하다. "따끈따끈 찐 계란이 왔어요.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가 왔어요." 이제는 엄마에게 시원한 사이다와 찐 계란, 호두과자보다 더한 것도 안겨드릴 수 있는데 엄마의 고운 치마폭이 없다.

엄마가 서울 구경을 마치고 집으로 오셨을 때 멀미를 하지 않으셨는지 여쭸다. 엄마는 참으로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차멀미를 왜 하니? 호숩기만 하고 좋더라."

엄마를 오래오래 더 호숩게 해 드리지 못한 아쉬움으로 산다. 나는 육십이 다 된 나이에 운전을 시작했다. 시골 구석으로 차를 몰아 다문화 가정을 방문하면서 제일 먼저 엄마가 떠올랐다. '호숩다' 하시는 엄마를 자동차에 모시고 손녀 집에도 가고, 삽다리 장에도 가고, 볕 좋은 봄날 꽃구경을 하고, 해가 설핏해지면 따끈한 온천물에 몸 담그시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호숩다, 참 호숩다고 하셨을 텐데.

'호숩다'를 찾아보니 자동차나 놀이 기구를 탈 때 몸이 쏠리거나 흔들거려 신나고 짜릿하다는 뜻의 전남 방언이란다. 표준어로는 '재미있다'인데 '호숩다'의 맛이 당최 나질 않는다. '호숩다'는 표준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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