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상공인한테) 50조원 푼다더니… 그 돈 다 누구한테 갔나요. 저는 지금 1000만원이 없어 난린데."
경기도 화성시 동탄에서 미술 학원을 운영하는 김모(48) 원장은 지난 며칠 새 금융기관 여덟 곳을 '뺑뺑이' 돌았다. 정부가 발표한 50조원 중소기업·소상공인 지원 정책 패키지에 포함된 연리 1.5%짜리 '소상공인 경영애로자금' 대출을 받기 위해서다. 김 원장 학원은 정부 권고에 따라 지난달 26일부터 휴원 중이다. 한 달 넘게 수입이 끊겨 밀린 임차료와 직원들 월급, 생활비를 대려면 한 푼이 아쉬운 판이다.
"처음엔 동탄 소상공인지원센터를 찾아갔는데, 일주일이 넘도록 보증이 안 나와요. 혹시나 해서 주거래은행(하나은행) 가니 '3월 정책 자금은 이미 다 소진됐다'고 하더라고요."
급한 마음에 농협과 기업은행도 가 봤지만 헛일이었다. "주거래은행이 아니다" "휴업 중이라 소득 증빙이 안 된다"는 이유로 모조리 거절당했다. 마지막으로 신용보증재단을 찾아갔지만 "신청이 폭주해 3개월치가 밀려 있다"는 설명만 들었다. 그는 "대통령과 정부가 TV에서 당장 자금 융통을 해 줄 것처럼 발표해 희망을 가졌는데, 이게 뭐냐"면서 "아침부터 소상공인지원센터에 줄 선 사람들에게 '시간 낭비하지 마라'고 소리치고 싶다"고 했다. 정부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매출 절벽'에 처한 소상공인·중소기업을 위해 50조원 규모의 지원책을 발표했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대출 병목' 현상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수십조원의 정책 자금을 쏟아 내고 있지만 정작 자금은 경제 실핏줄인 소상공인까지 제대로 흘러가지 못하는 것이다.
◇소상공인, 정책 자금 매달리는데…
25일 서울 서초구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소진공) 서울남부센터에는 아침 8시부터 300여 명의 소상공인이 길게 줄을 섰다. 최대 1000만원을 연이율 1.5%로 빌려주는 소상공인 대출을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현장에서 대출 신청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90여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210여 명은 번호표와 함께 "토요일에 다시 오라"는 안내만 받았다.
전국 수십만명 '김 원장'이 긴급 자금 대출을 받기 위해 이리저리 뛰고 있지만 대출 집행이 제대로 안 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서울 충무로에서 인쇄업을 하는 김재성(74) 사장은 "정말 돈이 급해 찾아왔는데 (대출까지) 한 달 넘게 걸릴 수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의 소상공인지원센터에서 만난 그는 "대통령이 '(정책 자금이) 그림의 떡 안 되게 하라'는 말만 믿고 왔는데, 한 달을 어떻게 기다리느냐"며 "3월 들어 매출이 아예 빵이다 빵. 임차료도 못 냈다"고 했다.
경기 안산에서 돼지갈비집을 하는 서모(41) 사장은 "지난달 14일 대출 신청하고 한 달째 보증 승인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지역 신용보증재단 갔다가, 소진공 센터 갔다가, 은행 갔다. 계속 뺑뺑이 돌다 신보에 전화했더니 '(보증) 승인 문자도 안 보냈는데 왜 독촉 전화하느냐'며 핀잔만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이달 말 카드 대금 400만원 갚아야 하는 데 이러다 신용불량자 될까 두렵다"고 했다.
◇"비 오는 날 우산 뺏는 정부"
정부는 자금 집행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소상공인 경영애로자금 신청은 지난 18일 현재 11만6000여 건, 6조2000억원이다. 하지만 지난 10일까지 집행된 금액은 1648억원으로 신청액의 4.6%에 불과하다. 그나마 최근 실행률은 중기부가 공개하지 않고 있다. 3월 셋째 주 지역 신보 보증서 발급은 하루 평균 4347건에 불과하다. 울산광역시에서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운영하는 김모(55) 사장은 소상공인지원센터를 통한 저리 대출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중소기업중앙회가 운영하는 '노란우산공제'에 10여 년간 낸 적립금(1300만원)을 깨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기껏 찾은 상담 센터에서 도움은커녕, 화만 더 얻었다.
"적립금 담보 대출을 하려고 했더니 연 2.9%를 달라고 하더군요. 소상공인 정책자금이 연 1.5%인데…" 해지를 하고 적립금을 돌려받으려 했지만, 폐업을 안 한 상태에서는 1020만원밖에 받을 수 없었다. 이자나 세제 혜택은 고사하고 원금도 못 받는 셈이다. 그는 "어떻게든 폐업은 면해보려고 찾아간 건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면서 "50조원 같은 숫자만 외칠 것이 아니라 이런 불합리부터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서울 중구에서 한식집을 하는 최모(58) 사장은 1년분 부가가치세 2000만원을 내려고 서울신용보증재단에 대출 보증 신청을 했다가 "세금 완납 증명서가 없으면 못 해 준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는 "세금 낼 돈이 있으면 내가 왜 대출을 받겠느냐"면서 "'비 오는 날 우산 뺏는다'더니, 그게 지금 정부가 하는 일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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