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세대'가 장악한 한국… 과거에 사로잡혀 미래 못 봐

입력 2020.03.26 03:00 | 수정 2020.03.26 16:51

[미래학회 첫 여성 회장 박성희]

1인 국민소득 100달러이던 시절 국가 미래 고민한 선배들에 경의
2048년이면 대한민국 100년… 이렇게 분열된 사회 상상 못해, 머리 맞대 미래 계획 세울 것

"50여년 전 그 어려웠던 시절, 선배 지식인들이 머나먼 이국 땅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꿈꾸며 함께 고뇌했던 열정에 경의를 바친다. 우리는 눈앞 현실에만 정신이 팔려 미래를 준비하는 걸 아예 잊은 건 아닐까."

최근 한국미래학회 회장에 선임된 박성희(57)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부 교수는 미래학회 52년 사상 첫 여성 회장이다. 1968년 발족한 미래학회는 근대화가 시대 과제였던 시절, '발전'에서 '삶의 질'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앞날을 제시해왔다. 회원들은 인문·사회·자연과학을 아우르는 학제적 접근으로 전공의 벽을 넘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었다. 최형섭(과학기술처 장관), 이헌조(LG전자 회장), 김호길(포항공대 초대 학장), 함병춘(청와대 비서실장), 김재익(청와대 경제수석)…. 관계와 기업인, 언론인까지 쟁쟁한 인재들이 참여했다. 미래학회가 1970년 내놓은 '서기 2000년의 한국' 보고서는 30년 뒤 한국 사회를 내다본 선구적 연구로 평가받았다.

박성희 교수는 이한빈 초대 회장이 1965년 낸 책 ‘작은 나라가 사는 길: 스위스의 경우’를 복간한다고 했다. “어려웠던 시절 미래를 고민한 선각자의 꿈과 열정을 확인하고 다시 대한민국의 미래를 조망하려는 의지를 담았다”고 했다.
박성희 교수는 이한빈 초대 회장이 1965년 낸 책 ‘작은 나라가 사는 길: 스위스의 경우’를 복간한다고 했다. “어려웠던 시절 미래를 고민한 선각자의 꿈과 열정을 확인하고 다시 대한민국의 미래를 조망하려는 의지를 담았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미래학회 탄생의 주역은 1964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만난 30대의 이한빈(1926~2004·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최정호(87·전 연세대 교수)였다. 서울대 영문과를 나와 하버드대 MBA를 받은 이한빈은 6·25전쟁 중 조국에 돌아와 재무부 예산국장, 사무차관까지 올랐다가 5·16 직후 외무부 공사로 제네바에 부임했다. 이한빈과 독일 유학생 겸 일간지 특파원으로 일하던 최정호는 조국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다 손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았다. 잇따라 귀국한 두 사람은 1968년 미래학회를 출범시키고, 이한빈이 초대 회장, 최정호가 2대 회장을 맡았다.

―1964년 5월 서른한 살 베를린 유학생 최정호는 이한빈에게 '10년 후 조국의 미래에 대한 전망 없이 배회하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할 때마다 탈주병과 같은 부끄러운 양심을 느끼곤 한다'고 편지를 썼다.

"두 분이 나눈 편지를 읽고 존경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꼈다.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를 겨우 넘기고 나라 꼴이 형편없을 때인데,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우린 국민소득 3만달러를 넘긴 지 오랜데, 대한민국이 가야 할 곳은 어딘지 목표를 잃은 게 아닌가 싶다. 미래를 내다보기는커녕, 오늘의 갈등을 어떻게 넘길지도 막막하다."

―요즘 지식인들에겐 대한민국의 10년 후에 대한 고민과 부끄러움이 있나.

"할 말이 없다. 요즘은 미래를 묻지도 않고, 혼란스러워할 뿐이다.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도 드물고, 개인의 노후 설계만 생각한다. 보수든 진보든 목표를 상실한 시대다. 우리 스스로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 게 아닌가 싶다."

―당장 눈앞 현실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미래를 고민한다는 게 사치처럼 느껴진다.

"이한빈 초대 회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인용하면서 엘리트 집단의 시관론(時觀論)이 한 사회의 변동 수준을 결정한다고 했다. '과거의 긴 기억'에 발목 잡힌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미래에 대한 긴 기대'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언제까지 과거사 논쟁에 발목 잡혀 있을 것인가."

―당장 무엇부터 할 것인가.

"선배들이 미래학회를 할 때는 요즘처럼 '운동권 세대'가 장악한 한국 사회는 상상하지 못했다. 다 함께 잘사는 나라를 생각했지, 이렇게 첨예하게 분열된 사회는 예상치 못했다. 학회 출범 초 30년 뒤 한국 사회의 미래와 씨름했듯, '대한민국 100년' 프로젝트를 시작할 생각이다. 2048년이면 대한민국 100년을 맞는다. 대한민국은 '현대사의 기적'으로 불릴 만큼 성공의 역사를 써온 나라다. 정기 포럼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100년의 의미를 짚고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 머리를 맞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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