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자동차 업계가 코로나 환자들을 위한 인공호흡기 생산에 나서기로 했다. 23일(현지 시각) 로이터 등에 따르면, 폴크스바겐과 BMW 등 자동차 기업들이 3D 프린터 기계를 활용, 인공호흡기 생산을 준비하고 있다. 인공호흡기는 폐렴 증상을 겪는 코로나 중증 환자에겐 꼭 필요한 필수 의료장비다.

이탈리아 인공호흡기 제조업체 시아레가 생산하는 인공호흡기 제품

제너럴모터스(GM)·포드·테슬라 등 미국 자동차 업체도 인공호흡기 등 의료 장비 생산에 돌입할 전망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앞서 22일(현지 시각) 트위터를 통해 “자동차 업체들이 인공호흡기 및 의료 제품을 제조하기 위한 승인을 받고 있다”며 “힘내라”고 했다.

마스크처럼 단순한 공산품은 생산 라인을 손보면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다. 중국에선 전자업체·전기차 업체 등이 생산설비를 손봐 마스크를 생산한 바 있고, 최근엔 자동차 업체 피아트크라이슬러(FCA)가 향후 수주 안에 월 100만개 생산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인공호흡기는 환자의 생명을 좌우하는 고정밀 기계다. 왜 굳이 자동차 회사들이 인공호흡기를 만든다고 나섰을까. 제품 품질은 믿을 수 있을까. 만약 만든다면 언제쯤 나올까. 여러 의문이 쏟아져 나온다.

업계에서도 자동차 업체들의 인공호흡기 생산을 두고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전시(戰時)에 준하는 비상상황에서 못할 게 뭐 있겠느냐’는 주장과 ‘정밀 기술이 들어가는 기계를 생산라인만 바꾼다고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는 주장이 맞부딪치고 있다.

◇“자동차는 종합 산업…인공호흡기 정도는 무리 없이 생산”

자동차 업체들이 인공호흡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근거는 자동차 제조가 기계·전자 제품을 모두 다루는 ‘종합산업’이라는 점이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자동차 공장은 2차 대전, 한국 전쟁 당시 군수품부터 생필품까지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종합 공장 역할을 해 왔다”면서 “자동차 제조에 흡·배기, 공조 장치 등이 있는 걸 감안하면 큰 무리 없이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공호흡기는 공기 압축 장치(컴프레서)를 통해 호흡에 필요한 압력을 만들고, 이를 밸브와 펌프 등을 통해 환자의 폐에 불어넣는다. 컴프레서와 밸브·펌프 등은 자동차 공조 장치 제조에도 쓰이는 부품이다.

자동차 생산공장 조립 라인. 기사 내용과 무관

자동차 공장은 전시상황에선 전략군수공장으로 바뀔 수 있다. 국가 예산을 집행해 생산라인을 개조하면 못 만들 제품이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8일 코로나 사태와 관련된 필수 물품 공급을 늘리기 위해 민간 부문의 물자공급에 개입하는 국방물자생산법을 발동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당장 완제품 생산은 어렵더라도, 일단 인공호흡기에 들어가는 각종 부품이나 플라스틱 사출품이라도 만들어서 공급하면 결과적으로는 인공호흡기 공급량 증대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 측면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맞는다”고 했다.

◇의료기기 업체들도 5년 걸리는데, 자동차 업체가 안전한 완제품 생산한다고?

그러나 생산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고정밀 기술이 필요하고 규제도 까다롭다는 이유에서다. 자동차 분석업체인 맨로앤어쏘시에이츠의 샌디 먼로 창업자는 미국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인공호흡기는 기존 자동차 공장보다 훨씬 더 청결한 무균실에서 제조해야 하고, 인공호흡기를 만들기 위해 직원들을 훈련시키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인공호흡기는 그냥 공기 호스가 달린 상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복잡한 기계”라고 말했다. 미국 허핑턴포스트는 “직원들의 제조 공정 교육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인공호흡기를 만들려면 최대 90일 정도 걸리는 미 식품의약국(FDA)의 검증도 받아야 한다”고 전했다.

인공호흡기 완제품

자동차 공장에서 생산한 인공호흡기의 안전성과 품질이 보장되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시장 조사업체 글로벌데이터는 “인공호흡기는 환자 생명과 직결되는 의료기기로 엄격한 품질 실험과 사후 관리가 필수적”이라며 “의료기기 업체들조차 인공호흡기를 개발 후 양산하기까지 평균 4.7년이 걸리는데,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당장 안전한 인공호흡기를 만드는 것은 극히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공호흡기는 정밀 센서를 기반으로, 개별 환자의 폐활량에 적합한 공기 압력을 맞춰서 호흡을 불어넣는다.

설령 생산된다고 하더라도, 극히 미미한 양이라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자동차 공조 장치와 인공호흡기는 생산 공정 유사성이 거의 없어 일반 생산라인에서 만들긴 어렵다”며 “3D 프린터로 제조한다고 해도 하루 생산량은 극히 미미해 코로나 확산세를 막기엔 역부족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거 혹시 정치쇼는 아닐까?

인공호흡기 생산이 가능하다고 보는 쪽에서도 당장 양산이 어렵다는 지적에는 동의한다. 워싱턴포스트는 “빨리 생산한다고 해도 1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글로벌 코로나 비상사태가 얼마나 지속할지 몰라도 수요에 맞춰 제때 공급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동차 회사의 인공호흡기 생산이 실제로는 ‘정치적인 보여주기’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에선 생산량 확보를 공언해 민심을 달랠 수 있고, 자동차 업체들 입장에서도 이번 기회에 코로나 사태로 가동 중단된 공장을 돌려 강제 휴업 상태를 피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서로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 업체들로선 코로나 사태에서 ‘국익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을 앞세우면 추후 진정 국면에서 차 판매에 도움이 되는 마케팅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