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이탈리아 공공 의료의 민낯

입력 2020.03.21 03:16

손진석 파리특파원
손진석 파리특파원
이탈리아 밀라노에 사는 50대 교민이 "TV를 보다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지난 10일 현지 방송사 취재진이 병원에 찾아가 '인공호흡기가 모자라는데 누구에게 우선 씌워주느냐'고 묻자, 의사가 "젊은 사람 먼저"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 중 회생 가능성이 낮은 고령자는 치료를 포기할 상황이라는 의미다.

같은 날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에 밀라노의 한 병원에서 일하는 응급의학과 의사의 이야기가 실렸다. "비상용으로 아껴둔 인공호흡기까지 전부 꺼내 썼어요. 이제 방법이 없습니다. 이탈리아 전역에 인공호흡기는 3000개가 전부예요."

이런 이야기들로 볼 때 지난 10일쯤 이미 이탈리아는 중환자를 살려내기가 물리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봉착했다. 10일까지 이탈리아 내 사망자는 631명이었지만 19일에는 3405명으로 5배 이상이 됐다.

명색이 G7 회원국인 이탈리아가 인공호흡기를 일부러 적게 비치했을 리 없다. 돈이 부족해 투자를 못 했다고 봐야 한다. 이탈리아는 국가 채무가 3230조원에 달한다. 경제 규모는 독일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빚은 독일보다 17% 더 많다. 이탈리아 국민 1인당 나랏빚은 5350만원꼴에 이른다. 그래도 포퓰리즘은 여전하다. 연금 수령 연령을 낮추고 저소득층에게는 기본 소득을 주면서 현금을 두둑이 찔러준다.

나라 살림이 만신창이가 됐지만 멈추지 않고 현금을 뿌려대니 보건·의료 분야에 투자할 여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이탈리아 정부의 국민 1인당 보건 예산은 2008년 3490달러였지만 2016년에는 2739달러로 뒷걸음질쳤다. 그런데도 보편적 의료를 제공하겠다며 의료 부문을 계속 정부가 움켜쥐고 공공 서비스로 운영한다. 의료 장비가 부족하고 인력 수준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의 국민 1000명당 병상은 3.2개로 독일(8개)의 절반도 안 된다. 인공호흡기 숫자는 독일(2만5000개)의 8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젊은 의사들은 공무원 신분으로 월급이 묶이는 게 싫다며 영국, 스위스, 독일로 이민을 떠났다. 2005년부터 10년간 고국을 등진 이탈리아인 의사가 1만명에 달한다. 이런 상태에서 전염병이 급습하니 견뎌낼 재간이 없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프랑스나 스페인도 의료 시설·인력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유럽 내 한국인들이 고국으로 피신하는 이유는 '병에 걸릴 것 같다'가 아니라 '걸리면 치료 못 받는다'에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을 계기로 유럽식 사회주의 복지 모델은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평소 '정부가 다 보살펴 줄게'라고 속삭이지만 그런 약속을 하는 정부는 너무 많은 빚에 허덕이고 있어 위기 시 무능력하다. 나라 살림이 건실하지 못한 국가는 역병(疫病)이 돌 때 국민의 목숨을 지켜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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