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의 핵심은 '건너가기'다. 그것을 '바라밀다'라고 한다. 건너가려면 우선 자기가 서 있는 곳에 대한 믿음과 확실성을 부정해야 한다. 그 부정의 논리가 '공'(空)이다. 자기가 서 있는 터전은 시간에 따라 부식한다. 지혜가 없으면 부식된 곳에 계속 머무르려 하고, 지혜가 있으면 건너가려 한다. 이미 있는 지식과 이론을 품었다가 그대로 다시 내뱉는 대답은 계속 머무르는 행위고, 아는 것을 바탕으로 모르는 곳을 궁금해하는 질문은 건너가는 행위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대답의 결과로 나온 것은 단 하나도 없고, 모두 다 질문의 결과다. 그러므로 인류를 이롭게 하는 질문이 보시(布施)다. 건너가기가 선한 행위임은 당연하다. 건너가기의 실패는 삶의 실패다. 국가도 건너가기를 할 수 있어야 발전한다. 건너가기를 못하면 전도몽상(顚倒夢想)에 빠진다. 또 전도몽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건너가기에 실패한다.
사람만 바뀐 것을 '혁명'으로 꾸몄다
이론이나 이념은 뿌리 역할을 하는 세계에서 생산된 꽃이다. 지혜가 적으면 꽃만 보고, 지혜가 크면 시선의 무게중심을 뿌리에 둔다.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다 특정한 조건의 세계에서 피워낸 꽃이다. 주도권은 뿌리에 있지 꽃에 있지 않다. 뿌리에 물을 줘서 꽃을 피우려 하는 것이 지혜이고, 뿌리를 키우려 꽃에 물을 주는 것이 전도몽상이다. 전도몽상에 빠진 조선을 위해 통곡하는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 아직도 들린다. "조선 사람은…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주의와 도덕은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주의(主義)는 다 꽃이다. 대한민국이 뿌리다. 주의로 대한민국을 통제하려는 것이 전도몽상이다. 전도몽상은 노예의 특색이니, 노예의 특색을 가지면 결국 노예로 산다. 우리의 강산에는 신채호 선생의 통곡소리가 아직도 그대로다. 이제는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이념들의 매개 없이 시대의 급소에 직접 접촉하려는 지적 태도를 갖춰야 한다.
전도몽상에 빠져 있는 것도 문제이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전도몽상에 빠져서 건너가기가 멈춘 것이다. 과격한 건너가기를 혁명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자칭 '촛불 혁명'은 있었으나 '촛불'이 더 이상 '혁명'이 아님은 분명해졌다. 사람만 바뀌었지 구조는 그대로다. '혁명'이 아닌 것이 문제가 아니라 '건너가기'가 멈춘 것이 문제다. 오죽하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조스트라다무스'라고 조롱하는 말까지 생겼겠는가. 반대파를 겨냥해서 했던 말들이 죄다 자신에게 그대로 되돌아와서 적용되기 때문이다. 사람만 바뀐 것을 혁명으로 꾸미려는 사이에 건너가기는 멈췄다.
정부 태도. 세월호 때와 차이 있나
박근혜 정권에서 있었던 문제들이 문재인 정권에서 죄다 일어나고 있다. 구체적으로 열거할 필요조차 없다. 세월호 참사 때 상황실에서 어떤 장관이 컵라면을 먹다가 '황제라면'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모두가 슬픔에 잠겨 있는데 불경스럽게 컵라면을 먹었다며 분노하던 여론으로 끝내 해임되었다. 참사 당일 노래방과 한정식 집에서 여흥을 즐긴 사람들을 대통령은 사장으로도 임명하고 장관으로도 임명하였다. 컵라면과 노래방 사이가 그리도 먼가? 코로나로 나라가 난리다. 확진자가 막 증가하기 시작하고 첫 사망자가 나온 날, 대통령은 짜파구리 파티를 하며 파안대소하였다. 세월호 당일의 그 대통령과 코로나 사망자가 나온 당일의 이 대통령이 그렇게 많이 다른가? 세월호 선장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하고 자신은 유유히 빠져나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안심하라고 해놓고 자신은 서울을 빠져나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코로나가 곧 종식될 것이니 안심하고 경제활동에 매진하라고 말하면서 청와대는 소독하였다. 각각의 사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준 각각의 태도에 구조적으로 정말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세월호'가 정권을 무너뜨릴 정도로 큰 사건이었던 이유는 대통령이 '해야만 했던 것'을 안 했기 때문이다. 지금 '코로나'에 분노하는 이유도 정부가 '해야만 하는 것'을 안 하거나 우왕좌왕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마스크 문제도 있고 중국인 입국 금지 문제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벌써 탄핵이니 하야니 하는 말들이 붙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이전에 그런 일을 당했던 대통령들과 내용은 달라도 구조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내게는 누가 더 잘했느니 못했느니보다 우리의 건너가기가 멈춘 것이 더 크게 보인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주저앉아 있어야 한단 말인가.
생각해야 질문할 수 있다. 알고 있는 것 다음으로 건너가려고 궁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건너가기도 생각의 결과다. 우리가 같은 구조 속에서 멈춰 있는 것은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성이나 논리나 법보다는 감각과 감성과 선동이 더 큰 역할을 하는 이유다. 해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실제로 만나 보니 살아 있는 악마처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칸트의 도덕률을 실천했노라고 자부하는 보통 사람으로 보였다. 이런 그가 그렇게 극악한 죄를 짓게 된 이유는 아예 생각 자체를 못 하고 그에 따라 자발성이 총체적으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생각해야 건너갈 수 있다. 어떤 대통령에게 감성적으로 몰입하는 일보다도 생각하는 힘을 길러 건너가기를 해야 한다. 생각 없이 감성적으로 몰입하다 보면 보통 사람도 아이히만이 된다. 우리나라는 생각의 결여로 민주화 시대에 멈춰 서서 건너가지 못한 채 너무 오래 서 있다.